창조의 목적
기사의 번역
범주
Full Description
창조의 목적
Dr. A.B Philips
번역: 카람 김은수
머리말
인간 창조의 목적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한번쯤은 고민해본 주제다. 가끔씩은 혼자서 다음과 같이 중얼거려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왜 내가 존재하는 거지?" “어떤 목적으로 내가 지구상에 있는 걸까?"
다양하고 복잡한 인간의 몸과 지구의 오묘한 시스템을 바라볼 때면 그 어떤 '궁극의 존재'가 이 모든 것들을 창조하였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디자인이 있으면 디자이너가 있기 마련이다. 해변에 찍힌 발자국을 볼 때면 우리는 누군가가 이전에 그 곳을 걸어갔다고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파도가 모래에 파고들어 우연에 의해 사람의 발자국과 똑같은 무늬를 남겼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마찬가지로 인간이란 아무런 목적 없이 그냥 존재하는 것이라고 처음부터 결론짓는 사람은 없다. 이성을 지닌 인간이 자연스레 목적을 동반한 행동을 취하듯이 '지성을 지닌 궁극의 존재' 역시 반드시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인간을 창조하였다고 추론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 존재의 목적에 대해 알고 있어야만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현세의 삶을 잘 이해하고 우리에게 최종적으로 득이 되는 행동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리는 항상 존재해 왔다. 그들의 의견에 따르면 물질은 영원하며 인간은 우연에 의해 조합된 물질의 결과물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은 왜 인간을 창조하였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할 수 없다. 그들에 따르면 존재에는 목적이 없다. 그러나 여러 시대에 걸친 대다수 사람들은,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인간을 창조한 '궁극의 존재'가 있음을 확신해왔다. 그들에게 있어서 '창조자'를 알고 인간 창조의 목적을 아는 것은 중요한 문제다.
답변
“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였는가?"라는 질문에 답변하기 전에 먼저 그 질문이 어떤 관점에서 제기되었는지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 질문은 “어떠한 동기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였는가?" 라고 풀이될 수 있는 반면 인간의 관점에서 본다면 “어떠한 목적으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였는가?"라고 해석할 수 있다. 두 관점 모두 “왜 내가 존재하는가?"라는 어려운 질문을 반영하고 있다. 다음 페이지에서는 성서를 통해 두 질문에 대해 답변해보려고 한다. 사실 이 주제는 인간의 추측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인간의 어림짐작은 이 문제에 관한 그 어떤 진리도 도출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두뇌 혹은 그보다 고차원적인 이성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인간이 자기 존재의 실체에 대해 정확히 추론해내기란 불가능하다. 따라서 여러 시대를 걸쳐 많은 철학가들이 위 질문에 관해 고민하고 나름대로의 답변들을 만들어냈지만, 그 답변들 모두 증명될 수 없는 가정에 기초한 것들이다. 심지어 몇몇 철학가들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내놓길, 우리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이 세상은 허영에 불과하다고 한다. 예를 들어 그리스 철학가 플라톤(428-348 BC)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이 오감을 통해 알게 되는 매일의 변화무쌍한 세계는 일차적 실제가 아니며 다만 참된 세계에서 비롯된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다.[1] 또 다른 이들은 이미 언급된 바와 같이 인간 창조에는 아예 목적 자체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들에 따르면 우리가 존재함은 단순한 우연의 결과물이다. 생명이 무생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면 그 생명이란 한낱 우연에 다름 아니므로 거기에 목적이란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인류의 '친척'인 원숭이들도 그들 존재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데 굳이 우리 인간이 그 문제에 대해 깊이 파고들 필요가 있느냐는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가 왜 창조되었는지 잠시 동안 고민하다 이내 생각을 접어버리지만 위 질문에 대한 답변을 아는 것은 실로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위 질문에 대해 정확히 답하지 못하는 이상 우리는 주위의 여타 동물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존재가 되어버리고 만다. 먹고 마시고 교미하는 동물의 기본 욕구와 성욕이 인간 존재의 근본 목적이 되고 인간의 노력은 이 한정된 영역에만 집중된다. 물질적 만족이 삶의 가장 중요한 목적으로 자리잡을 때 인간의 존재는 동물보다 더 낮은 차원으로 퇴화한다. 존재의 목적을 알지 못할 때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이성을 그릇된 방향으로 사용하게 된다. 타락한 인간의 지성은 마약과 무기를 만들어내는 데 쓰이고 인간은 간통, 포르노, 동성애, 점치기, 자살 등에 몰입한다. 삶의 목적을 알지 못한다면, 인간은 그 존재의 의미를 상실한 나머지 소모적인 삶을 살아가고 영원한 행복이 있는 내세의 삶으로부터 완전히 격리되고 만다. 그러므로 “우리가 왜 여기에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정확히 답변하는 것은 너무도 중요한 문제다.
위의 답변을 찾기 위해 우리는 우리와 같은 인간인 다른 이들에게서 해답을 구해보지만, 깔끔하고 정확한 답변은 오직 하나님의 계시서를 통해서만 찾을 수 있다. 인간 스스로 정확한 답변을 찾을 수 없음을 알기에 하나님은 인간에게 그분의 예언자들을 통해 계시를 내리셨다. 모든 하나님의 예언자들은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였는가?"에 대한 해답을 가르쳐준 것이다.
유대-기독교 경전
진심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자가 성경을 유심히 읽어본다면 분명 길을 잃고 헤매게 될 것이다. 구약은 가장 중요한 문제인 인간의 창조보다는 율법과 고대인의 역사, 유대인 등에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2] 구약의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육일 만에 세상과 아담과 이브를 창조하셨고 칠일 째 되는 날 그분의 일을 끝내고 '휴식을 취하셨다'.[3]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을 거역한 죄로 벌을 받고, 그들의 아들 가인은 형제 아벨을 죽이고 놋의 땅으로 가서 살게 된다. 그러한 나머지 하나님은 사람을 만든 것에 대해 '후회'하고 만다![4] 왜 성경에서는 창조의 이유가 오해의 여지 없는 명확한 용어로 설명되어 있지 않는가? 왜 저 많은 상징적인 표현을 써가면서 독자가 그 뜻을 추측하게끔 만드는가? 예를 들어, 구약의 창세기 6:1-2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유대인의 분파와 그들을 따르는 기독교의 많은 분파들은 제각기 나름대로의 설명을 붙이고 있다. 진실을 말하자면, 이전 예언자들이 인간 창조의 목적을 가르쳐 주었지만 그들 이후의 몇몇 추종자들은 사악한 무리들의 압력에 굴복한 나머지 성서의 내용을 바꾸었다.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은 모호해졌고 대부분의 계시는 상징적인 표현 속에 묻혀버렸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유대인에게 보내셨을 때, 예수는 성전에서 판을 벌이던 장사치들을 내쫓은 후[5] 유대인 랍비들의, 의식에 치중한 율법 해석을 비판하였다. 예수는 모세의 율법을 확증하였고 그 율법을 다시 되살렸다. 그는 제자들에게 삶의 목적을 가르쳐주었고, 이 세상을 떠나가 전까지 목적에 충실한 삶이 어떤 것인지 제자들에게 몸소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가 이 세상을 떠나자 소위 제자라고 자칭하는 몇몇 이들은 그의 메시지를 왜곡하였다. 이전 예언자들의 메시지가 그랬듯이, 예수가 가져왔던 명백한 메시지 역시 모호해졌다. 상징주의가 도입되었고 -특히 신약의 요한 계시록이 그러하다- 예수에게 계시되었던 복음서는 사라졌다. 4세기 경의 주교 아타나시오스는 잃어버린 예수의 복음서를 대체하기 위해 인간의 손으로 적힌 네 권의 복음서를 채택하였다.[6] 바울이 쓴 편지로 구성된 23권의 책과 기타 책들이 신약에 포함되었고 그 분량은 네 권의 복음서를 넘어선다.[7] 결과적으로, 신약을 아무리 읽어보아도 “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였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8] 특정 분파가 만들어 낸 교리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방법이 아니고는 해답을 구할 수가 없다. 복음서들은 각 분파의 신조에 따라 제각각 해석되기 때문에 진리를 추구하는 자는 무엇이 정확한 해석인지 알지 못한 채 헤매게 된다.
하나님의 육신화(肉身化)
인간 창조의 목적에 관해 기독교 분파들이 한 목소리로 동의하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인간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그로 인해 인간은 자신의 아버지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원죄로부터 벗어난다는 주장이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 원죄라는 것은 너무나 막대한 것이라 인간이 아무리 속죄하고 참회해도 그 죄가 용서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좋은 분이시므로 죄를 지은 인간은 그분 앞에 설 수 없다. 따라서 오직 하나님 자신의 희생이 있을 때만이 비로소 인간은 자신의 죄를 씻을 수 있다. 사람이 지어낸 이 우화는 –교회의 주장에 따르면– 이제 구원의 유일한 방법이 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기독교에서의 인간 창조의 목적은 '하나님의 희생'을 인지하고 예수를 주님으로 받드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같은 맥락으로 요한복음에 기록된 예수의 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다."[9]
그러나, 만약 이것이 인간 창조의 목적이고 영원한 삶을 누리는 전제 조건이라면, 왜 모든 예언자들은 이 사실을 가르쳐주지 않았는가? 왜 하나님은 아담과 그의 자손이 있던 그 시절에 인간으로 변하여, 모든 인류에게 존재의 목적을 충족시키고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는 동등한 기회를 주지 않으셨는가? 아니면 예수 시절과 예수 이전의 시절에는 존재의 목적이 서로 달랐단 말인가? 예수에 관해 들어보지 못한 현시대의 사람들은, 그렇다면 창조의 목적을 실현할 기회가 아예 없다는 말인가. 그들이 주장하는 창조의 목적이란 인류의 필요를 충족시키기에는 너무도 그 범위가 한정되어 있다.
모든 것이 신이다
힌두 경전을 보면 신은 여럿이며, 신들은 사람의 육체를 가진다. 또한 신은 인격을 가지며 모든 것이 브라만(Brahman), 즉 신이다. 살아있는 모든 생물체의 자아(atmari)가 브라만이라는 신조에도 불구하고, 억압적인 카스트 제도가 규정하길, 브라만 계급(승려 계급)의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우월한 영혼을 가진다. 베다(Veda[10])를 가르치는 그들은 종교적 순결함의 표상일 뿐만 아니라 각종 사회적 특권을 누릴 권리를 지닌다. 반면에 수드라 계급에는 종교적인 지위가 없으며, 그들의 본분이란 다른 세 계급층과 수 천명에 이르는 그들의 하부 계급층을 '군말 없이 시중드는'[11] 일이다. 힌두교의 일원론 철학가들의 주장에 따르면, 인류의 존재 이유는 인간의 신성을 실현하기 위함이며, -윤회의 고리로부터 해방(mokshd)되기 위한 길(marga)를 따름으로써- 인간 영혼(atman)이 궁극적 실체인 브라만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Bhakti의 길[12]을 따르는 자의 삶의 목적은 신을 사랑하는 것인데, 신이 인간을 창조한 목적은 인간과의 관계로부터 기쁨을 얻기 위해서기 때문이다. 그 관계는 마치 “아버지가 자식들과의 관계로부터 기쁨을 얻는 것과 같다"(Srimad Bhagwatam). 일반 힌두교도들에게 있어서 현세 삶의 목적은 사회적, 종교적 의무를 잘 수행하고 자신이 속한 카스트 계급의 여러 전통적 규칙들을 잘 따르는 것(karma의 길)이다.[13]
베다에 언급된 대부분의 종교 의식(불의 희생 의식에 관해 집중하고 있다)은 다른 책에 기록된 힌두교의 교리와 의식에 의해 빛을 바랬지만 베다가 가지는 권위와 신성함은 사실상 모든 힌두교의 분파와 전통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베다는 총 네 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가장 오래된 것은 Rigveda('지혜의 구절')이다. 이 책에서는 아주 혼란스런 용어들로 신을 설명하고 있다. Rigveda에 투영된 종교는 다신교로서, 하늘과 대기에 관련된 신들을 달래는 방법에 집중하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신들을 꼽아보면 '인드라'(하늘과 비의 신), '바루나'(우주 질서의 수호자), '아그니'(희생제의 불), '수르야'(태양) 등이 있다. 후기 베다를 보면, 초기 베다에서의 신들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고, 다신론은 존재하는 모든 것, 즉 프라자파티(Prajapati, 창조물의 주)를 위한 희생제적 범신론으로 대체된다. 우파니샤드(Upanishads, 우주 질서에 관한 비전(秘傳))에서는 프라자파티의 개념이 궁극적 실체이자 우주의 본질인 브라만과 혼합되어, 그 결과 신화가 추상 철학으로 변형되는 과정을 겪는다.[14] 만약 올바른 길로 인도되기 위해 의존할 수 있는 것이 이 책들 뿐이라면 우리 인간은 다음과 같이 결론지을 것이다 : 신은 자기 자신을 숨기고 인간 창조의 목적도 숨겼다!
하나님은 혼란스런 책의 저자가 아니며 인간에게 어려움을 바라지도 않는다. 따라서 하나님은 1,400년 전 인류에게 마지막 계시를 내릴 때, 그 후에 올 모든 세대를 위해 계시서의 완벽한 보전을 약속하였다. 그 계시서, 즉 꾸란(코란)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인간 창조의 목적을 알려주셨고 그분의 마지막 예언자를 통해 인간이 이해 가능한 차원에서 모든 것을 상세히 설명해주셨다. 다음 페이지에서는 이 계시서와 예언자의 가르침을 기초로 “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였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변을 내놓고자 한다.
하나님은 왜 만물을 창조하셨는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왜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였는가?"라는 좀 더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이 질문의 이유는, 실제로 인류는 그 창조의 위대함에 있어서 가장 우월한 위치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마지막 성서인 꾸란의 가피르 장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신다 :
“단연코 하늘들과 땅의 창조가 인간의 창조보다 더 위대하나 대부분의 인간은 알지 못하노라." [꾸란, 40:57]
인간의 육체는 그가 존재하고 있는 우주보다 훨씬 덜 복잡하다. 그러나 이 사실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는 사람은 극히 적다. 인간은, 지구상에서 자신이 가장 우월한 피조물인 것이 확실하고, 우주를 여행하고 기술과 지식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켰으니,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존재는 바로 인간 자신이라는 거만한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한번쯤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인간이 이룬 대부분의 위대한 발견은 인간 존재에 관한 것이 아닌 그를 둘러싼 여러 환경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존재보다는 물질 세계에 더 집중하려 한다. 하나님은 위 꾸란 구절을 통해 인간을 그의 실제 위치로 되돌려 놓으신다. 인간은 하나님의 놀라운 창조 행위로부터 비롯된 존재들의 조그마한 일부분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왜 인간을 창조하였는지 이해하기에 앞서, 우리는 그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인 '하나님은 왜 창조하시는가'에 대해 답해야 한다.
창조자
근본적으로 창조는 '창조자'라는 신성(神性)의 결과물이다. 창조자가 창조하지 않는다면 창조자라는 용어 자체부터가 모순이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그분의 피조물을 필요로 한다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은 모든 필요를 초월하시는 분이다. 피조물이야말로 그분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위대한 저자의 글 솜씨가 그의 글을 통해 자연스레 드러나듯이, 창조는 신성의 완벽함을 확연히 나타낸다. 진실된 의미에서의 창조는 하나님 한분에게서만 발견된다. 인간은 자신도 창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가 행하는 창조는 진정한 창조가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이미 창조된 것들을 조합할 뿐이다. 우리가 식탁을 만들 때 쓰이는 목재는 나무로부터 나오고 목재 조립에 필요한 나사못은 쇠로부터 만들어지며 그 쇠는 돌에서 추출된다. 나무와 돌은 인간이 만들지 않았다. 사실 인간의 창조행위 모두는 인간이 만들 수 없는 기본 구성요소로 거슬러 올라간다. 화가도 마찬가지다. 그가 '창조하는' 미술 작품은 그가 관찰한 것에 기초한다. 시각에 의해 인지되지 않은 것을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화가의 생각 모두는 이미 창조된 것들을 반영한 결과물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다. 이 기본적인 사실에 대해 일부 사람들은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현대와 고대의 몇몇 철학가들은 어떻게 하나님이 무로부터 유를 창조할 수 있느냐면서, 창조된 세계와 그 구성물 모두는 원래 하나님의 일부라고 주장한다.[15] 즉,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일부를 떼어내어 우주를 만드셨다. 이미 존재하는 것을 수정하는 방법으로만 '창조'할 수 있는 인간과 근원적 창조자인 하나님을 비교함으로써 그들은 이 같은 결론을 도출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종류의 비교를 부정하신다. 이러한 비교는 그분께 인간의 제한적인 속성을 부여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마지막 성서인 꾸란의 앗-슈라 장에서 그분께서 말씀하시길 :
“그분과 비슷한 것은 없노라. 그분은 모든 것을 들으시는 분이시고 모든 것을 보시는 분이시라." [꾸란, 42:11]
따라서 창조 행위는 창조자라는 신성의 결과물이다. 마지막 성서인 꾸란의 다양한 구절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창조자로 언급하시면서 모든 것은 그분에게 귀속된다는 사실을 인간에게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창조자이시며 모든 것의 의탁의 대상이노라." [꾸란, 39:62]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너희들과 너희들의 행위를 창조하셨도다." [꾸란, 37:96]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그 어떤 일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나쁜 것을 피하고자 할 때나 좋은 것을 얻고자 할 때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 의지하는 것은 커다란 잘못이다. 많은 사람들이 주문이나 부적, 별자리, 손금 등을 통해 악운을 막고 길운을 불러들이려 하지만 이 같은 시도는 무지의 소치다. 따라서 마지막 성서인 꾸란의 알-팔라끄 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사악한 것을 피하고자 할 때 하나님 당신께 요청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말하라 : 새벽의 주님이신 하나님께 보호를 요청하라. 그분께서 창조하신 것의 사악함으로부터(하나님께 보호를 요청하라). [꾸란, 113:1,2]
알라(Allaah), 즉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악하지 않으시다. 그분은 선(善)이시다. 그분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였고 그 안에는 그분께서 주신 능력에 의해 좋은 것과 나쁜 것을 행할 수 있는 존재들이 있다. 그러나 나쁜 것과 좋은 것 모두는 하나님의 허락이 있을 때만이 발생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이외의 존재에게 도움과 보호를 요청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재앙은 오직 하나님의 허락이 있을 때만 발생하노라." [꾸란, 64:11]
하나님의 마지막 예언자 무함마드(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 는 이 개념에 관해 다음과 같이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기억하라. 모든 사람이 모여서 너를 도우려고 해도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너에게 득이 되는 것으로 이전에 기록하신 것뿐이라. 모든 사람이 모여서 너를 해치려도 해도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너에게 해가 되는 것으로 이전에 기록하신 것뿐이라."[16]
자비로우시고 용서하시는 분
인간 창조를 통해 확연히 드러나는 하나님의 속성 중에는 용서, 자비, 친절도 포함된다. 인간은 선하고 순수하게 창조되었고 타고난 인지력으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분할 수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내면에 욕망을 창조하심과 동시에 그 욕망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도 주셨다. 그 능력을 적절히 활용하면 하나님의 법을 잘 준수할 수 있으나 그 능력을 사용하지 않을 때 그는 맹목적으로 욕망만을 쫓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인간이 그분에게 불복할 것이란 사실도 잘 알고 계셨다. 따라서 그분께서는 아담부터 시작하여 인간들에게 참회하는 법과 죄로부터 자신을 정화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아담과 이브는 전 인류가 따라야 할 모범을 제시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잊었고 사탄이 그들의 욕망을 교묘히 이용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지만 이내 용서를 구했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용서하셨다. 인간의 불복종과 하나님께 대한 참회는, 널리 용서하시고 무한히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잘 드러낸다. 이에 관해 마지막 예언자(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는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만약 그대들이 죄를 전혀 짓는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대들 대신 죄를 짓는 다른 사람들을 두시어 그들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도록 하실 것이라. 그 후 그분께서는 그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실 것이라."[17]
하나님의 마지막 성서인 꾸란의 114장 모두, 한 장을 제외하고, “자비로우시고 자애로우신 하나님의 이름으로"라는 문구로 시작한다. 이 문구를 통해 하나님의 자비와 관용이 강조되며 이를 통해 인간은 절망의 늪에 빠지지 않게 된다. 저지른 죄가 얼마나 막중한지에 상관없이, 하나님께 진심으로 뉘우치는 자가 있다면 그분께서는 그의 죄를 용서하여 주신다. 하나님의 사도(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 의 말씀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창조를 시작하실 때 그분의 책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시어 그 내용이 실현되도록 하셨도다 : '나의 자비는 나의 분노를 능가하노라.' "[18]
그의 또 다른 말씀은
"하나님께는 그분의 자비를 백 개로 나누시어 그 중 하나를 인류와 진과 동물들에게 내려보내셨노라. 그 하나의 자비로 인해 그들은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에게 친절하게 행동하는 것이니 동물들조차 새끼들을 사랑으로 대하더라. 하나님께서는 나머지 아흔 아홉 개의 자비를, 심판의 날 그분을 진정으로 경배하는 자들을 위해 보관해 두고 계시노라."[19]
하나님이 원하셨다면, 그분께서는 인류를 전혀 죄를 짓지 않는 천사와 같이 창조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분께서 원하시는 바가 아니니, 그분께서는 이미 천사들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인간은 실수를 저지를 수 있도록 창조되었고 그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할 때, 자비와 관용이라는 하나님의 속성은 명백히 드러나게 된다.
궁극의 정의로움
인간이 심판을 받게 되는 이 세상의 마지막 날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속성인 궁극의 정의로움과 공평하심은 명백히 드러난다. 하나님께서는 지구상의 모든 인간을 창조하신 후 -그분이 가지신 무한의 지식으로써- 곧바로 몇몇 사람들을 천국으로 보내시고 나머지 사람들을 지옥으로 보내실 수도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기 전에 이미, 그가 현세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지, 어떤 음식을 먹고 어떤 기회를 부여 받을 것인지, 믿음으로 죽음을 맞이할 것인지 아니면 불신자로 죽을 것인지를 모두 다 알고 계신다. 그렇기에, 어떤 이는 천국을 위해 창조되었고 다른 이는 지옥을 위해 창조되었다고 말해도 전혀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예언자 무함마드(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의 아내 아이샤가 전하는 그의 말씀을 인용해보면
“하나님께서 천국과 지옥을 창조하시고 그 후 그곳의 거주자를 창조하셨음을 알지 못하는가?"[20]
만약 하나님께서 천국에 들어갈 자들을 곧바로 천국으로 들여보내셨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결정에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천국의 거주자는 축복받은 영원의 삶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지옥에 들어가지 않음에 감사할 것이다. 그러나 곧바로 지옥으로 들어간 자들은 분명 이의를 제기할 것이다. 그들이 만약 지구에서 삶을 살았을 경우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 그들 자신도 알지 못하기에 이것은 불공평한 처사라고 생각한다. 지옥의 거주자들이 강력히 주장하는 바는, 그들이 만약 지구에서 삶을 살았다면 분명 하나님을 믿고 선한 행동을 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지구에서 직접 살아볼 수 있도록 하시고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그 결과 지옥에 들어가는 모든 이는, 지옥을 선택한 자는 다름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은 자신의 삶 속에 내려졌던 하나님의 자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증거와 인도를 부정했던 그들의 죄 역시 수긍하게 된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이의의 여지가 없는 공정한 판결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한번 현세의 삶을 살아갈 기회를 달라고 간청하는데, 꾸란의 앗-싸즈다 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신다.
“그대가 죄지은 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그들 머리를 수그리는 모습을 볼 수만 있다면. (그들이 말하길) “우리의 주님이시여! 저희는 보았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저희를 되돌려 주십시오. 선한 행동을 하겠습니다. 진실로 우리는 (이제) 확실히 믿는 자들입니다."" [꾸란, 32:12]
그러나 만약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시 한번 현세로 돌려보내더라도 그들은 지옥에서 본 것을 잊은 채 또다시 악한 삶을 살고 따라서 예전과 변함없이 지옥에 들어가게 된다. 이 사실에 관해 하나님께서는 알-안암 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만약 그들이 되돌려 보내진대도 그들은 그들에게 금지된 것으로 또다시 다가갈 것이니 진실로 그들은 거짓말쟁이들이라." [꾸란, 6:28]
하나님의 사랑
믿는 자든 불신자든 생명체로 존재하여, 짧은 시간일지라도 삶을 향유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하나님의 사랑은 명백히 드러나게 된다. 악이 아닌 선을 선택한 자를 위해 만들어진 천국, 그 천국의 존재를 인지할 때도 하나님의 사랑은 느껴진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마지막 성서를 통해 말씀하시길, 그분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은 선을 행하는 자(5:13), 공정한 자(5:42),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9:4), 인내하는 자(3:146), 그분께 의탁하는 자(3:159), 그분께 용서를 구하고 자신을 정화하는 자(2:222) 등이다. 또한 그분께서는 인간을 위해 어떤 것이 선이고, 공정함이며 경외심인지 그분의 성서와 예언자를 통하여 정의하여 주셨다. 따라서 예언자들을 따르는 자들이야말로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사랑스러운 자들이다. 알루 이므란 장에서 하나님께서 예언자 무함마드(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에게 명령하시길 믿는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라고 하셨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나를 따르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너희들을 사랑하실 것이며 너희들의 죄를 용서해주실 것이라." [꾸란, 3:31]
예언자들을 따르는 것은 비단 하나님께서 의무로 정하신 행위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신앙 행위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의 자비와 축복을 주심에 있어 받을 자격이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널리 베푸신다는 사실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특히, 진정으로 참회하는 자를 너그러이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바라볼 때면 더욱 그러하다. 인간 역사의 시작에부터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이브의 참회를 받아들여주셨고 그들의 예는 그들 이후의 모든 인류가 따라야 할 본보기가 되었다. 그 죄가 얼마나 막중하든 상관없이 참회의 문은 심판의 그날까지 늘 열려있다. 아나스가 전하는 하나님의 예언자(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의 말씀을 보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길 : 오 아담의 자손이여, 네가 나를 부르고 나에게 요청하는 한 나는 너를 용서해줄 것이니 그것은 나에게 쉬운 일이라. 오 아담의 자손이여, 너의 죄가 하늘의 구름에까지 미칠 정도라도 나는 너를 용서해줄 것이라. 오 아담의 자손이여, 네가 나에게로 왔을 때 너의 죄가 지구의 크기만큼이더라도, 네가 나와 대등한 존재를 두지 않았다면, 나는 네가 지은 죄의 크기만큼의 용서를 줄 것이라."[21]
하나님의 은총
천국에 들어가는 자는, 그의 선행 하나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그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에 관해 마지막 예언자(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가 말씀하시길
“최선을 다하고 그 결과에 만족하라. 그의 선행 하나로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라." 그의 교우들이 묻길 “오 하나님의 사도시여, 당신도 그러합니까?" 그가 대답하길 “나 역시 마찬가지라, 하나님께서 나를 자비와 은총으로 감싸주지 않는 한 (나 역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노라).[22]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사랑스러운 행위는, 비록 그것이 조그마한 것일지라도 꾸준하게 실천하는 행위임을 알라.“[23]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은총에 기준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그분의 은총은 수혜자의 올바른 믿음과 선행에 근거하여 주어진다. 알루 이므란 장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길
“선을 행한 자는 그것과 비슷한 것의 열 배를 받을 것이며, 악을 행한 자 그가 받을 것은 오직 그것과 비슷한 것뿐이니 그들은 부당하게 다루어지지 않을 것이라." [꾸란 6:160]
만약 하나님께서 인간을 엄격하게 심판하신다면 그 누구도 그의 선행이 악행보다 더 무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행의 가치를 증가시키고 악행의 가치는 있는 그대로 기록하시니 그로 인해 그분의 은총은 더욱 드러나게 된다. 진정으로 믿는 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다. 그렇다고 해서 행위가 그 어떤 역할도 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행위가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절대적인 요소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행위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따라서, 인간의 존재와 그가 저지르는 잘못, 그가 행하는 선행 모두는, 하나님의 속성인 자비와 용서, 정의로움, 은혜 등을 드러내기 위한 배경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속성을 드러냄에 있어서 왜 이러한 방식을 선택하셨는지 인간이 따져 물을 수 없다. 다만 이 방식이 가장 좋은 방식일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는 있는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묘사하시길 가장 현명하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계시해주신 사실 그것만 알 뿐이다.
“그들이 지식으로써 인지할 수 있는 대상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에 한정되노라." [꾸란 2:255]
따라서 인간은 자신을 하나님과 같은 존재로 두어선 안된다. 하나님께서 어떤 결정을 내리시고 그 이유를 인간에게 알려주신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며, 우리가 하나님께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질문할 수 없다. 그러한 질문은 끝이 없으며 따라서 그것은 인간의 능력 밖의 일이다. 심판의 날 왜 그런 행동을 했고 왜 그런 의도를 가졌는지 질문 받는 이는 우리 인간이지 하나님이 아니다. 이와 관련하여 하나님께서는 안비야 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그분은 그분의 행위에 관해 질문 받지 아니하시며 그들이야말로 질문을 받을 것이라" [꾸란 21:23]
같은 맥락에서 이븐 압바스가 전하는 예언자 무함마드(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가 말씀하시길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 깊이 생각하되 하나님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말라"[24]
하나님의 실체에 관해 숙고하는 것은 무한(無限)에 대하여 숙고하는 것이다. 한정된 우주와 그 안의 은하계와 별들에 대해 깊이 생각하면 할수록 우리의 머리는 복잡해진다. 하물며 창조되지 않은 존재에 대해 이해하려 들 때 우리는 더욱 난해함을 느낄 것이다. 예언자(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께서 경고하길, 사탄의 힘이 믿는 자의 마음 속에 의문을 일으켜, 하나님에 대해 답변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지도록 유혹할 것이라고 하였다. 아부 후라이라가 전하는 예언자(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의 말씀은 다음과 같다.
“사탄이 그대들에게 와서는 다음과 같이 물을 것이라 : 이것은 누가 창조했는가? 저것은 누가 창조했는가? – 결국 그가 묻길 : 너의 주님은 누가 창조했는가? 이런 경우에 ['하나님과 그분의 예언자들에 대한 믿음을 확증합니다'라고 말함으로써][25] 하나님으로부터 보호를 요청하라. 그리고 [그러한 생각들을] 피하라."[26]
하나님은 왜 인간을 창조하셨는가?
“하나님은 왜 인간을 창조하셨는가?"라는 질문은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다음과 같이 풀어쓸 수 있다. “어떤 목적을 위해 인간이 창조되었는가?" 하나님의 마지막 성서인 꾸란은 위 질문에 대해 그 어떤 애매함도 없이 아주 명쾌히 답변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 창조의 첫 순간에 인간에게 알려주시길,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본능적인 직감을 타고 난다. 알-아으라프 장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길 :
“너희들의 주님께서는 아담의 자손들로부터, 그들의 등으로부터 그들의 자손들을 꺼내신 후 그들 자신에게 증언토록 하셨노라 : “내가 너희들의 주님이지 않은가?" 그들이 말하길 “그렇습니다! 우리는 증언합니다!" 그렇게 하여 심판의 날 너희들이 “우리는 이것에 대해 몰랐습니다."라고 말하지 않도록 함이라. 또는 “하나님과 대등한 존재를 둔 것은 이전의 우리 조상들입니다. 우리는 단지 그들의 후손일 뿐입니다. 거짓(하나님 이외의 존재를 숭배하는 행위)을 일삼는 자들의 행위로 말미암아 저희까지 파괴하시려는 것입니까?"라고 너희들이 말하지 않도록 함이라. [꾸란, 7:172-3]
예언자(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께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셨을 때 그분께서는 이슬람력 12월 9일[27], '나으만'이라는 장소에서 아담으로부터 서약을 받으셨다. 그 후 하나님께서는 아담으로부터 인간을 뽑아내시니, 마지막 그날까지 태어날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 줄지어 섰고,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도 서약을 받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들 하나 하나를 일대일로 대면하시어, 그분이야말로 그들의 주님임을 증언토록 하셨다.[28] 따라서 모든 인간은 자신의 영혼에 각인되어 있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응답해야 한다. 선천적으로 주어진 이와 같은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께서는 인간 창조의 목적에 대해 앗-다리야트 장에서 다음과 같이 정의하셨다.
“내가 진[29]과 인간을 창조한 것은 오직 그들이 나를 경배토록 하기 위함이라," [꾸란, 51:56]
이와 같이, 인간이 창조된 근본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경배함에 있다. 그러나 위대하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경배를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 자신께서 무언가 필요해서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다. 인류 모두가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사실이 그분의 영광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하나님은 완벽하시다. 그분께서는 어떠한 필요도 없으신,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다. 반면 모든 피조물은 무언가를 필요로 한다. 그러하기에 인간은 하나님을 경배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경배의 의미
왜 인간이 하나님을 경배해야 하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경배'라는 용어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어야 한다. 영어의 worship(경배)은 '명예'의 뜻을 가진 고대 영어 weorthscipe라는 단어에서 비롯한다. 따라서 worship, 즉 경배는 '하나님의 명예를 위한 헌신적 행위'로 정의된다.[30] 이 의미에 따르면, 인간이 하나님께 감사함을 표현하는 방법은 그분을 찬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지막 성서인 꾸란의 안-나쓰르 장에서 그분께서 말씀하시길 :
“그러하니, 그대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라."[꾸란, 110:3]
하나님을 찬미함으로써 인간은, 선천적으로 창조주를 찬미하는 인간 이외의 존재와 조화를 이루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꾸란의 여러 장들을 통하여 이와 같은 현상에 관해 언급하고 계신다. 예를 들어, 알-이스라 장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길 :
“일곱 개의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것들은 하나님을 찬미하며 그분의 영광을 찬미하지 않는 것은 없노라.[31] 그러나 너희들은 그들의 찬미를 이해하지 못하노라." [꾸란 17:44]
반면, 마지막 성서인 꾸란의 언어, 즉 아랍어로 경배는 '이바다'라고 하며, 이 단어는 '종'의 의미를 지닌 명사 '압드'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종은 그의 주인이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 행하는 자를 말한다. 따라서 마지막 성서인 꾸란에 따르면, 경배는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보내신 모든 예언자들의 한결 같은 핵심 메세지이다. 예를 들어, 예언자 예수는 위와 같은 뜻으로서의 경배를 강조하여 말하길 마태복음서 7:21을 보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이 '하나님의 뜻(의지)'은 예언자들이 그들의 추종자들에게 가르쳐준 하나님의 법률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을 찬미함에 있어 그분께서 알려주신 방법을 따른다면 찬미 행위 역시 경배가 된다.
경배의 필요성
인간은 왜 하나님이 계시한 법률에 따라 그분을 경배하고 찬미해야 하는가? 왜냐하면 하나님의 법률을 따르는 것이야말로 현세와 내세에서 성공하는 비결이기 때문이다.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이브는 천국에서 창조되었으나 하나님의 법률을 어긴 결과 천국에서 추방되었다. 인간이 다시 천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법률을 잘 따르는 것이다. 마태복음서에 따르면 메시아 예수가 말하길 하나님의 율법을 따르는 것은 천국의 문을 여는 열쇠이다. : 그런데 한 사람이 다가와서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내가 영생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는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한 분은 오직 한 분뿐이시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고자 하거든, 계명들을 지켜라."[32] 또한 마태복음서 5:19에서 예수는 율법을 엄격하게 지킬 것을 강조하였다. “누구든지 이 계명 가운데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폐지하고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라고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이 계명을 지키며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법률은 삶의 모든 분야에 있어 올바른 길을 제시하고 있다. 그 법률은 인간에게 좋은 것과 나쁜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며, 인간 삶의 모든 것을 아우르는 총체적인 시스템을 제공한다. 하나님의 피조물에게 득이 되는 것은 무엇이고 그 반대의 경우는 무엇인지 가장 잘 아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이시다. 하나님의 법률은 인간의 정신과 육체, 인간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행위와 실체를 명령하고 금한다. 하나님의 법률을 잘 준수하여 그분을 경배함으로써 인간은 올바른 삶을 살고 개개인의 가능성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다.
하나님 기억하기
하나님의 법률에 담겨진 모든 종류의 경배 행위는 하나님을 기억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만들어졌다. 사람은 가끔씩 가장 중요한 일조차 잊어버리게 마련이다. 물질적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온 정신을 쏟아 부은 나머지 정신적 풍요로움을 완전히 잊어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다. 진정으로 믿는 자에게 있어 규칙적인 예배는 하나님을 기억하기 위한 시(時)테크의 역할을 한다. 예배는 하루 하루의 정신적 필요와 물질적 필요를 서로 잘 엮어준다. 먹고 일하고 잠자는 것이 하나님과의 연결고리를 새롭게 다지는 것과 조화롭게 연결된다. 정해진 시간에 드리는 규칙적인 예배와 관련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마지막 성서인 꾸란의 따하 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신다.
“진실로 나는 하나님이니 나 이외에는 경배 받을 존재가 없노라. 그러니 나를 경배하고, 예배를 드림으로써 나를 기억하라" [꾸란 20:14]
단식과 관련하여 하나님께서 바까라 장을 통해 말씀하시길
“오 믿는 자들이여! 그대들 이전의 자들에게 의무로 규정되었던 것처럼 그대들에게도 단식이 의무사항으로 규정되었노라. 이는 그대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위함이라." [꾸란 2:183]
하나님을 기억하는 행위는 믿는 자들에게 적극적으로 권장된다. 하나님의 법률에 따르면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모든 삶의 영역에 있어 중용이 덕목이지만, 하나님을 기억하는 행위만큼은 예외이다. 실제로 하나님을 '너무 많이' 기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마지막 성서인 꾸란의 아흐잡 장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가능한 한 많이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권장하신다.
“오 믿는 자들이여! 하나님을 자주 많이 기억하라." [꾸란 33:41]
하나님을 기억하는 행위가 강조되는 이유는 보통 하나님을 잊어버릴 때 죄를 저지르기 때문이다. 악의 힘이 가장 자유로이 활동하는 시간은 하나님이 잊혀졌을 때이다. 따라서 사탄의 힘은 사람들의 마음에 부적절한 생각과 욕망을 채워 넣어 하나님을 잊게 하고자 노력한다. 하나님을 잊는 순간, 사람들은 부정(不正)한 것들에 거리낌없이 다가서게 된다. 이와 같은 현상은 하나님의 마지막 성서인 꾸란의 무자달라 장에 잘 표현되어 있다.
“사탄이 그들 마음을 장악하니 그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리더라. 그들은 사탄의 무리라. 진실로 사탄의 무리 그들이야말로 손실자라." [꾸란 58:19]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법률을 통해 술과 마약을 금하셨는데, 술과 마약은 사람들이 하나님을잊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인간의 몸과 마음은 마약과 도박에 쉽게 물든다. 한번 중독된 이상 인간의 욕망은 계속적인 자극을 원하고 그것을 위해 폭력과 부정한 짓을 서슴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마지막 성서인 꾸란의 마이다 장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신다.
“술과 도박을 통해 사탄이 원하는 것은 그대들 사이에 적의와 미움을 심는 것이며 그대들이 하나님을 기억하고 예배를 드리는 것을 방해코자 함이라. 그러니 그대들은 주의하지 않겠는가?" [꾸란 5:91]
따라서 인간은 다름아닌 자기 자신의 구원과 성장을 위해 하나님을 기억해야 한다. 모든 인간은 나약해질 때가 있으며 그 시기에 우리는 죄를 짓기도 한다. 만약 하나님을 기억할 그 어떤 방법도 없다면 우리는 죄를 지을 때마다 더 깊은 타락의 길로 빠져들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률을 따르는 자는 꾸준히 하나님을 기억할 것이며 이로 인해 그는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자기 자신을 고쳐 잡을 수 있다. 하나님의 마지막 성서는 이와 같은 과정을 알루 이므란 장에서 아래와 같이 정확히 묘사하고 있다.
“중죄를 범하거나 자신을 방황시켜 악한 짓을 저질렀으나 하나님을 떠올리고 자신의 죄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자들…" [꾸란, 3:135]
이슬람
현재 인간이 발견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경배 시스템은 이슬람이다. '이슬람'이란 뜻 자체부터가 '하나님의 뜻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것'이다. 보통 이슬람을 설명하면서 얘기하길 '세 개의 계시 종교(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중 세 번째 종교'라고 하지만 이슬람은 새로운 종교가 아니다. 인류를 위해 하나님께선 보내신 예언자들이 한 목소리로 전한 종교, 그것이 바로 이슬람이다.
이슬람은 아담의 종교이자 아브라함, 모세, 예수의 종교이다. 이와 관련하여 하나님께서는 예언자 아브라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신다.
“아브라함은 유대인도 아니고 기독교인도 아니었노라. 그는 하나님 한 분만을 경배하는 무슬림이었노라." [꾸란, 3:67]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인류도 한 종(種)이며 따라서 인류를 위해 하나님께서 지정해주신 종교도 하나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만을 위한 종교나 인도 사람만을 위한 종교, 유럽 사람만을 위한 종교를 따로 만들지 않으셨다. 인간의 정신적, 사회적 필요는 어디서나 동일하며 인간의 본성은 첫 번째 인류가 창조된 이래 그 어떤 변화도 겪지 않았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슬람 이외의 어떤 종교도 받아들이시지 않으신다. 이에 관해 그분의 마지막 성서인 꾸란은 아래와 같이 명료하게 기술하고 있다.
“진실로 하나님의 종교는 이슬람이라" [꾸란, 3:19]
“이슬람 이외의 것을 종교로 삼길 원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며 내세에서 손실자 중의 한 명이 될 것이라" [꾸란 3:85]
모든 행위가 경배 행위
이슬람의 시스템에서는 모든 행동 하나 하나가 경배 행위로 승화될 수 있다. 사실,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말씀하시길, 삶의 모든 부분을 하나님께 헌신하라 하셨다. 알-안암 장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길
“말하라 : 진실로 나의 예배, 나의 제물(祭物), 나의 삶, 나의 죽음은 하나님, 존재하는 모든 것의 주님을 위한 것이라." [꾸란, 6:162]
그러나 이러한 헌신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그 행위가 다음 두 가지 기본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
첫째 ; 행위는 진실되게 오직 하나님의 기쁨을 위한 것이어야 하며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믿는 자가 행동을 실천하기 전에 주의해야 할 사항은 그 행위가 하나님이나 마지막 예언자(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께서 금지한 것인지 확인하는 것이다.
세속의 행위를 경배 행위로 성공적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예언자(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에게 아주 조그만 행위일지라도 짧은 기도문을 말할 것을 지시하셨다. 가장 짧은, 그러나 모든 상황에서 사용할 수 있는 기도문은 다음과 같다 :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뿐만 아니라 각각의 상황에 적용될 수 있는 다른 기도문들도 많다. 예를 들어 새 옷을 장만하여 처음으로 입을 때 예언자(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라고 가르쳐주셨다.
오 하나님! 당신께 영광이 있습니다. 당신께서 저를 입혀주셨습니다. 이 옷에서 나오는 선(善)을 얻고 이 옷을 입을 자로부터 나오는 선을 얻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 요청 드립니다. 그리고 이 옷에서 나오는 악(惡)을 피하고 이 옷을 입을 자로부터 나오는 악을 피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보호를 구합니다.[33]
둘째 ; 행위는 예언자의 행동 양식과 일치해야 한다. 예언자의 행동 양식은 아랍어로 '순나'라고 한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인도받는 자들이기에, 모든 예언자들은 그들을 따르는 자들에게 자신의 행동 양식을 따르라고 하였다. 예언자들이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계시 받은 진실이었고, 예언자의 방식을 따르고 진실을 받아들인 자들만이 천국에서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이 같은 맥락에서 요한복음 14:6에 기록된 예수(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의 말씀은 다음과 같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동일선상에서 압둘라 이븐 마쓰우드가 전하길, 어느날 예언자 무함마드(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께서 땅바닥에 선을 하나 그은 후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길이라." 예언자는 그 후 (그 직선의) 좌우에 여러 갈래의 선을 그은 후 말씀하시길 “이것들은 [방황의] 길들로서, 각각의 길마다 악마가 있어 그 길들로 사람들을 초대하고 있노라." 그런 후 예언자는 다음 절을 낭송하였다. “진실로 이것이말로 올곧은 나의 길이라. 그러니 그대들은 그것을 따르라. 그리고 (다른) 길들을 따르지 말라. 그것들은 그대들을 그분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노라. 이것이 그대들에게 명령한 것이니 그대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위함이라.[34]"[35]
따라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유일한 방식은 예언자들의 방식을 따르는 것이다. 그렇기에 종교에 새로운 것을 지어내는 행위(아랍어로는 '비드아')는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사악한 짓이다. 예언자 무함마드(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께서 말씀하시길,
“가장 사악한 짓은 종교에 새로운 것을 지어내는 행위(비드아)이며, 비드아에는 저주가 있을 것이며 그것은 사람들을 불지옥으로 인도하노라."[36]
이슬람에서 비드아는 금지되며 하나님께서는 비드아를 받아들이시지 않는다. 예언자(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의 말씀을 그의 아내 아이샤가 전하길,
“우리의 것에, 우리 것이 아닌 새로운 것을 지어내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거부될 것이라:"[37]
기존 예언자들의 메시지가 왜곡되고 오늘날 여러 거짓 종교들이 성행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종교에 새로운 것을 지어내는 행위(비드아) 때문이다. 비드아를 피하는 방법은 '하나님에 의해 규정된 행위와, 진실된 하나님의 예언자들이 전해준 행위, 이 두 가지 종류 말고는 그 어떤 행위도 경배 행위로 인정되지 않는다'는 일반 원칙을 잘 지켜는 것이다.
가장 훌륭한 피조물
유일무이하신 하나님을 믿고, 그분과 대등한 존재를 가정하지 않고 그분에게 자녀가 있다고 주장하지 않으며, [위에서 언급된 일반 원칙에 따라] 선행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피조물 중에서 가장 으뜸이다. 즉, 인간은 그 창조의 위대함에 있어 가장 우월한 위치에 있진 않지만, 하나님의 피조물 중 가장 훌륭한 존재가 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알-바이이나 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계신다.
“진실로, (하나님과 예언자를) 믿고 선행을 실천하는 자 그들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피조물이라" [꾸란 98:7]
가장 무거운 죄
그렇다면 이제, 인간이 범할 수 있는 가장 무거운 죄는 창조의 목적에 모순되는 행위임을 알 수 있다. 압둘라가 전하길, 그가 하나님의 사도(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에게 어떤 죄가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크냐고 물었고 그가 대답하시길,
“하나님께서 그대를 창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과 대등한 존재를 두는 행위가 가장 무거운 죄라."[38]
하나님 이외의 존재를 경배하는 행위 -아랍어로는 쉬르크- 는 용서되지 않는 유일한 죄이다.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않고 죽은 자가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실 수 있지만, 단 쉬르크만은 예외다. 이와 관련하여 하나님께서 안-니싸 장에서 언급하시길 :
“진실로 하나님께서는 그분과 대등한 존재를 두는 행위를 용서하시지 않으시노라. 그러나 그 이외의 죄에 대해서는 당신께서 원하는 자에게 용서를 베푸시노라." [꾸란 4:48]
하나님 이외의 존재를 경배하는 행위는 그분의 피조물에게 창조자의 속성을 부여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여러 분파와 종교들은 제각기 그들만의 방식으로 쉬르크를 행한다. 논쟁을 일삼는 소규모의 무리는 여러 시대에 걸쳐 항상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해 왔다.[39] 창조자의 존재를 부정하는 그들의 입지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들은 '이 세계에는 시작이 없다' 라는 비논리적인 주장을 도입해야만 했다. 그들의 주장이 비논리적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가 바라보는 이 세계의 모든 사물에는 시작이 있다. 따라서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사물의 집합인 세계 역시 시작이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또한 논리적으로 생각해본다면 이 세계를 만든 존재는 세계의 일부분이 될 수 없으며, 이 세계처럼 시작을 갖고 있을 수 없다. 세계에는 시작이 없다는 무신론자의 주장은 우주를 구성하는 물질이 영원하다는 뜻이다. 이것은 '쉬르크'에 해당하는 주장으로서 시작이 없으신 하나님의 속성을 그분의 피조물에게 부여하는 행위이다. 그들의 이러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진정한 무신론자는 항상 극소수였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하나님이 존재함을 알고 있다. 몇 십년 동안 지속된 공산주의 정권의 세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러시아인과 중국인은 계속해서 신의 존재를 믿고 있다. 전능하신 창조자께서 안-나믈 장에서 이와 같은 현상에 대해 말씀하시길 :
“그리고 그들은 그것들(꾸란 구절)을 부당하고 거만하게 부정하였지만 그들의 영혼은 그것들을 확신하였더라." [꾸란 27:14]
무신론자들과 물질주의자들에게 있어서의 삶이란 그들 욕망을 충족시킴 이외에는 아무런 목적이 없다. 그들은 그들의 욕망에 순종하고 복종하니 하나님이 아닌 욕망이 그들의 신이 되어버렸다. 하나님의 마지막 성서인 꾸란의 알-푸르깐 장에서 그분께서 말씀하시길 :
“그대는 그의 욕망을 자신의 신으로 삼는 자를 보았는가?" [꾸란 25:43]
기독교는 예언자 예수를 하나님과 영원히 공존하는 자로 만들어 그에게 창조자의 속성을 부여[40]하는 한편 예수를 '성자(聖子)'로 칭하여 그를 하나님의 인격체로 만들었다. 반면 힌두교는, 하나님께서는 '아바타르'라 불리는 육신화 과정을 통해 오랜 기간 동안 인간의 모습으로 존재하였다고 믿으며 또한 하나님의 속성을 쪼개어 세 명의 신에게 할당하였는데, 브라마에게는 창조자, 비슈누에게는 보존자, 쉬바에게는 파괴자의 속성을 나누어주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
쉬르크가 성립하는 또 다른 경우는 인간이 누군가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의탁하고 두려워할 때다. 하나님의 마지막 성서 꾸란의 알-바까라 장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길 :
“인간들 중의 어떤 이는 하나님이 아닌 것들을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두어, 마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그들을 사랑하더라. 그러나 믿는 자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그 어떤 종류의 사랑보다) 더 크노라." [꾸란, 2:165]
누군가를 위한 사랑 혹은 그와 유사한 감정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보다 더 클 때, 인간은 그 누군가를 기쁘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 불복종하게 된다. 그러나 인간의 모든 감정이 몰입되어야 할 대상은 오직 하나님이며 그분만이 모든 피조물의 사랑과 두려움을 받을 자격이 있다. 아나스 이븐 말리크가 전하길 예언자(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다음) 세 가지 조건을 충족시키는 자는 신앙의 달콤함을 맛볼 것이라 : 하나님과 그분의 사도를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자;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자; 하나님께서 그를 이슬람으로 인도하여 주셨는데 다시 불신(不信)으로 돌아가야 한다면 차라리 불 속에 던져지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자."[41]
인간이 다른 이를 사랑하고 다른 피조물을 사랑하는 원인은, 하나님을 하나님의 창조물보다 더 많이 사랑해야 하는 이유가 된다. 인간은 삶과 성공을 사랑하고 죽음과 실패를 싫어한다. 그런데 그러한 삶과 성공의 원천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므로 인간은 그의 모든 사랑과 헌신을 그분께 마쳐야 마땅하다. 우리는 도움이 필요할 때 자신에게 이득을 주고 도와주는 자를 사랑한다. 그런데 모든 이득(7:188)과 성공(3:126)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므로 따라서 우리는 그 어떤 존재보다 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대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세어보려 한다면 결코 그것을 셀 수 없을 것이라" [꾸란 14:34]
그러나, 우리가 느끼는 하나님에 대한 지대한 사랑이 다른 피조물에 대한 사랑에 의해 감소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이 동물에 대해 느끼는 사랑이 다른 인간에 대해 느끼는 사랑과 같을 수 없듯이[42]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인간이 서로에게 느끼는 사랑을 초월해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사랑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법률에 대한 복종을 통해 드러나는데 알루 이므란 장의 꾸란 구절이 그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말하라 : '그대들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나를 따르라. 하나님께서 그대들을 사랑해주실 것이라'"[43] 이것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서로에게 느끼는 사랑 역시 복종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즉, 만약 사랑하는 이가 무엇을 요구할 때 인간은 그에게 느끼는 사랑의 정도에 따라 그것을 해주려고 노력할 것이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그분께서 사랑하시는 자에 대한 사랑으로 표현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그분께서 사랑하는 자를 미워한다거나, 반대로 하나님께서 미워하는 자를 사랑한다는 건 있을 수 없다. 아부 우마마가 전하는 예언자(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의 말씀은 아래와 같다 :
“하나님을 위해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해 미워하며, 하나님을 위해 주고 하나님을 위해 주지 않는 자는 그의 신앙을 완벽히 한 자라."[44]
따라서 올바른 신앙을 가진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모두를 사랑하게 된다. 마르얌 장에 언급된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면 그분께서는 믿는 자들의 마음 속에 신앙인을 위한 사랑의 감정을 불어넣으신다.
“진실로, (하나님과 예언자를) 믿고 선행을 실천하는 자, 가장 자비로우신 분(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믿는 자들의 마음 속에) 사랑을 불어넣으실 것이라. [꾸란 19:96]
같은 맥락에서 아부 후라이라가 전하는 하나님의 사도(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의 말씀은 아래와 같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종을 사랑하실 때 그분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불러 말씀하시길 내가 아무개를 사랑하니 너도 그를 사랑하라. 따라서 가브리엘은 그를 사랑하게 되노라. 그 후 가브리엘은 하늘의 거주자들을 불러모아 말하길 : '하나님께서 아무개를 사랑하시니 그대들도 그를 사랑하라' 따라서 하늘의 거주자들도 그를 사랑하게 되노라. 그 후 그는 지구의 사람들로부터도 사랑을 받게 되노라."[45]
기도
기도는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향한 것이어야 한다. 기도에 응답해주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기 때문이다. 진실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요청한다면 그분께서는 기꺼이 응하신다.
“나의 종들이 그대에게 나에 관해 묻거든, 진실로 나는 가까이 있노라. 기도하는 자가 나에게 요청할 때 나는 그의 기도에 응하노라." [꾸란 2:186]
예언자(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께서 이에 관해 강조하여 말씀하시길,
“네가 요청할 것이 있다면 오직 하나님께만 요청하라. 도움을 구할 일이 있다면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도움을 구하라."[46]
따라서 인간을 향한 기도나, 죽은 자나 살아 있는 자를 중재자로 하는 기도는 '쉬르크'다. 기도의 대상이 되는 존재는 곧 숭배의 대상이다. 안-누으만 이븐 바쉬르가 전하는 예언자(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 의 말씀은 다음과 같다.
“기도는 숭배 행위라"[47]
“진실로, 너희들이 기도의 대상으로 삼는, 하나님 이외의 것들은 너희들과 같은 종들에 불과하노라" [꾸란 7:194]
따라서, 가톨릭 신자들이 성인에게 기도하는 행위는 '쉬르크'다. 물건을 잃어버렸을 때 그들은 테베 안토니우스 성인에게 찾아달라고 기도한다.[48] 유다 다대오는 수호성인으로서 불치병, 확신이 서지 않는 결혼 등의 경우에 기도의 대상이 된다.[49] 여행을 할 때는 여행의 수호성인인 크리스트퍼에게 보호해달라고 기도한다. 그러나 크리스토퍼 성인은 1,969년 교황령에 의해 성인 목록에서 영구 삭제되는 불명예를 안게 되는데, 알고 보니 그는 실존하지 않는 가공의 인물이었던 것이다.[50]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에 대한 기도나 미가엘제(祭)[51]에서 하는 천사들에 대한 기도 역시 쉬르크다. 성인 숭배를 꺼리는 기독교인조차도 예언자 예수를 통해 기도하거나 그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면 그는 쉬르크를 범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언자 무함마드(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 에게 기도하는 무슬림(이슬람 신자)이 있다면 그의 행위는 쉬르크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예언자 무함마드(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 에게 아으라프 장의 다음 말씀을 추종자들에게 전하라고 명령하셨다.
“말하라(오 무함마드여) : 나는 -하나님이 원하실 때를 제외하고는- 나 자신에게조차 유익함이나 해악을 통제할 힘이 없노라. 만약 내가 보이지 않는 것을 알고 있었더라면 많은 재산을 확보했을 것이고 나에게 어떤 나쁜 일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 [꾸란 7:188]
아부 후라이라가 전하길, “그대의 가까운 친척들에게 경고하라,"[52]라는 구절이 예언자(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 에게 계시되었을 때 그는 친척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오 꾸라이쉬 사람들이여. (선행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의 응징을 피하시오. 나는 하나님에 관해 여러분들에게 그 어떤 힘도 없습니다... 오 무함마드의 딸 파띠마여, 네가 (현세에서) 원하는 것 무엇이든 나에게 요청하라. 그러나 나는 하나님에 관해 너에게 어떤 힘도 없단다.“[53]
하나님은 왜 인간을 지구 위에 살도록 창조하셨는가?
인간 창조의 목적과 관련한 질문은 한편으로는 인간이 거주하는 세계에 관한 질문일 수 있다. 그렇다면 질문은 이렇게 바뀔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이 세상에 살도록 창조하셨나?"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마지막 성서 꾸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꾸란의 알-물크 장과 알-카흐프 장을 살펴보면
“그분께서는 죽음과 삶을 창조하셨으니 너희들 중에 누가 가장 훌륭한 행동을 하는지 시험하기 위함이라. 그리고 그분께서는 가장 존엄하신 분이시고, 너그러이 용서하시는 분이시라." [꾸란 67:2]
“진실로 나[54]는 지구상의 것들을 아름답게 꾸며놓았으니 그들 중에 누가 가장 훌륭한 행동을 하는지 시험하기 위함이라." [꾸란 18:7]
따라서 인간이 이 세상에 창조된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위를 시험하시기 위해서다.[55] 이 세상에서의 삶과 죽음, 부유함과 가난함, 질병과 건강 등은 선한 영혼과 사악한 영혼을 구별하기 위한 수단이다. 신앙심 여부는 이 세상에서의 인간 행동으로써 식별된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사항은 이와 같은 행위의 시험이 하나님께 인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기 이전부터 인간에 관해 모든 것을 알고 계신 분이다. 위의 시험은 심판의 날, 지옥의 거주자가 자신의 거주지가 지옥일 수밖에 없음을 납득시키는 역할을 하며 천국의 거주자가 자신의 거주지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축복에 의한 것임을 알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인간과 관련하여 행위의 시험은 다음 두 가지 역할을 수행한다 : 첫째, 인간의 정신적 성장, 둘째, 응벌 또는 보상이 그것이다.
정신적 성장
이 세상에서의 시험은 무엇보다 인간의 정신적 성장을 목적으로 한다. 거친 금광석이 뜨거운 불을 통해 고순도의 금으로 바뀌듯이, 시련은 믿는 자의 품성을 성숙시킨다. 시련을 계기로 믿는 자는 원초적인 본능이 아닌 한층 높은 정신적 고귀함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믿는 자가 모든 시험을 다 통과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비록 통과하지 못한 시험일지라도 믿는 자는 그 시련을 교훈으로 삼고 미래에 있을 시험을 준비한다.
관대함과 자족감(自足感)
예를 들어, 관대함과 자족감은 사람이 공동체를 이루어 사는 곳이라면 예외 없이 가장 높은 덕목으로 평가 받는다. 그러나 만약 모두에게 동일한 양의 재산이 주어진다면 이와 같은 성품은 계발될 수 없다. 관대함은 재산을 모으고자 하는 자신의 욕망과 투쟁할 때만이 얻어지는 품성이다. 반면 자족감은 질투와 탐욕이라는 악의와 싸워 이길 때만이 발현되는 덕목이다. 창조주께서는 이 세상의 인간에게 각기 다른 양의 재산을 배분함으로써 이러한 정신적 투쟁에 단계를 두셨다. 하나님의 마지막 성서 꾸란의 안-나흘 장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길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양식에 있어 어떤 이들보다 다른 이들을 선호하셨노라." [꾸란 16:71]
인간의 자연적 욕망 중 탐욕과 인색함은 비도덕적인 속성이다. 하나님께서 계시를 통해 믿는 자들에게 알려주시길, 재산은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 주어진 의탁물이다. 부는 인간이 태어나기 전에도 세상에 존재해 왔고 인간이 죽은 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다. 하나님께서 내리신 지침에 의해 재산을 적절히 사용한다면 그 재산의 소유주는 현세와 내세에서 그 재산에 의해 축복을 받는다. 그러나 자신의 욕심만을 위해 그 재산을 사용했다면 그는 현세에서는 저주를, 내세에서는 응벌을 받을 것이다. 마지막 성서 꾸란의 알-안팔 장에서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재산과 자식의 위험에 대해 경고하고 계신다.
“그대들의 재산과 자식은 유혹에 다름 아님을 알라" [꾸란 8:28]
하나님께서는 더 나아가 알-무나피꾼 장에서 믿는 자들에게 경고하길, 재산과 자식에 대한 욕망이 그분께 대한 복종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라고 말씀하셨다.
“오 믿는 자들이여! 그대들의 재산과 그대들의 자식들이 하나님을 기억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라." [꾸란 63:9]
"그분께서는 어떤 이들 위로 다른 이들의 위치를 높이셨으니 하나님께서 그대들에게 주신 것으로써 그대들을 시험하기 위함이라" [꾸란 6:165]
재산을 축적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 더 많이 가질수록 더 많이 욕심을 내는 것이 인간이다. 예언자(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 께서 말씀하시길,
“금으로 가득 찬 계곡을 가진다고 해도 인간은 또 다른 계곡을 원할 것이라. 그의 입을 가득 채울 수 있는 것은 오직 (무덤의) 흙 뿐이라.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진심으로 참회하는 자를 용서해 주시노라."[56]
이러한 부정적 욕망을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선을 베푸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에게 명령하시길, 부유한 자들로부터 희사금을 모아 가난한 신앙인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셨다.
“그들의 재산으로부터 희사를 받아 그들을 정화하고 그것으로써 그들을 깨끗이 하라." [꾸란 9:103]
희사는 이슬람 초기 단계에서부터 규정된 사항으로 아랍어로는 '자카'[57](의무 희사)라고 한다. 믿는 자는 자신의 재산이 일정한 양을 넘어설 경우 정해진 비율만큼의 재산을 일년에 한 번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는데 이것은 모든 무슬림의 의무사항이자 신앙행위의 일부이다. 자카를 내지 않는 것은 막중한 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의무 희사를 통해 믿는 자들은, 재산이 그들 마음대로 처분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즉 그들은 재산의 일시적인 보관인일 뿐이며 재산의 일정 몫은 가난한 자들의 것이란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묘사하는 진정한 신앙인이란 그들 재산의 일정량을 가난한 자를 위해 남겨두는 자들이다.
“그리고 그들 재산에는 구걸하는 가난한 자와 구걸하지 않는 가난한 자를 위한 몫이 있노라" [꾸란 51:19]
그러나 자선금을 내는 것은 진정으로 오직 하나님의 기쁨을 위한 것이어야 하며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나 타인을 통제하기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자선이 현세의 이득을 위한 것일 때 자선의 보상은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하나님께서는 알-바까라 장을 통해 이와 같은 사실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다.
“오 믿는 자들이여! 선행을 은근히 자랑하거나 해를 끼침으로써 그대들의 자선을 헛된 것으로 만들지 말라." [꾸란 2:264]
질투심은 재산에 대한 탐욕을 부추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분께서 다른 이들에게 준 것에 대해 욕심내지 말라고 하셨다. 이와 관련해 하나님의 마지막 성서 꾸란의 안-니싸 장에서 그분께서 말씀하시길 :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떤 이들보다 다른 이들에게 더 많이 베푸신 것에 대해 그대들은 욕심내지 말라" [꾸란 4:32]
예언자(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 께서는 위에서 언급된 하나님의 조언을 다음과 같이 풀어서 설명하셨다.
“여러분들보다 적게 가진 자들을 보고, 여러분들보다 많이 가진 자들에게 눈 돌리지 말라. 그것이 여러분들에게 좋은 것이라. 그럴 때 여러분들은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베푸신 것들을 부정하지 않을 것이라."[58]
자기보다 더 많이 가진 자들만을 볼 때 인간은 질투를 느낀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불공평하게 대우했다고 생각한다. 남들이 가진 것을 자기도 가지고 싶은 탐욕 때문에 결국 인간은 여러 죄를 저지르고 만다. 그러나 이슬람의 조언은, 자신보다 적게 가진 자들을 보라는 것이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일지라도 항상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따라서 자기보다 적게 가진 이들을 볼 때 인간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풀어주신 여러 축복들을 떠올리게 된다. 질투심을 피하고자 하는 이러한 정신적인 노력을 통해 비로소 더 높은 차원의 만족감이 형성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예언자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물질적 소유는 이 세상에서의 진정한 부(富)가 될 수 없다. 아부 후라이라가 전하는 마지막 예언자(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의 말씀은 다음과 같다.
“재산은 소유가 아닌, 만족감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라."[59]
만족한다는 것은,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에 아무런 개선의 노력도 하지 않고 주어진 상황을 그대로 수긍한다는 뜻이 아니다. 만족한다는 것은 자신의 경제적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 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운명 지으신 것을 마음 편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현세에 대한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우리의 마음이 안정을 되찾으려면, 최선을 다한 후 그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이와 관련하여 마지막 성서 꾸란의 알-라으드 장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길 :
“보라. 하나님을 기억할 때 비로소 마음은 편안해지노라." [꾸란 13:28]
시련
현세의 시험은 '불행'과 '시련'이라는 옷을 입고 나타난다. 그러나 이러한 불행과 시련은, 진정으로 믿는 자의 정신적 성장을 돕고 그들의 죄를 씻어준다. 반대로 불행이라는 현세의 시험을 통해, 잠시 방황하던 믿는 자들은 다시 올곧은 길로 돌아오게 된다. 불신자들에게 있어서의 시련이란 내세에 있을 고통에 앞서 미리 받는 현세의 고통이다.
인내심
시련은 더 높은 차원의 인내심을 계발하기 위한 토대 역할을 한다. 따라서 신앙심 깊은 자들이 현세에서 많은 고통과 어려움에 직면하는 것은 어찌 보면 놀라운 일이 아니다. 싸으드가 전하길, 그가 예언자(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께 누가 가장 많은 시련을 받게 되냐고 물었고 그(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예언자들이라 ; 그 다음은 예언자와 비슷한 자들, 그 다음은 그들과 비슷한 자들이라. 인간은 그의 신앙심에 따라 시험을 받노라. 그의 신앙이 견고하다면 그에게 다가오는 시련의 고통은 커지며, 그의 신앙이 약하다면 그는 그의 신앙심에 걸맞는 시험을 받노라."[60]
진정한 인내심은 시련의 시기에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탁할 때 얻어진다. 주님께 의탁하는 것은 신앙 행위의 중요 부분이며 진정한 신앙심의 자연스런 결과물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란 우주 상의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따라서 인간의 전적인 의탁의 대상은 하나님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만이 그 어떤 약속도 깨트리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아무리 출중한 신앙심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실수를 저지르게 마련이다. 이 같은 실수로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실망시키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유수프 장에서 야곱의 말을 아래와 같이 전하고 계신다 :
“모든 결정은 하나님께 있나니 나는 그분께 의탁하였으며 의탁하는 모든 자는 하나님께 의탁하도록 하라" [꾸란 12:67]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확증하시길 우리가 그분께 전적으로 의탁한다면 가장 힘든 시기에도 그분으로써 모든 것이 충분하다고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께 의탁하는 자, 그에게 하나님으로써 충분하노라." [꾸란 65:3]
하나님께로의 의탁은 하나님 한 분만이 인간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아신다는 굳건한 믿음에 기초한다. 그 믿음이란, 인간이 보기에 좋은 것이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는 나쁜 것일 수 있으며 반대로 나쁜 것이 실제로 좋은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알-바까라 장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길
“그리고 그대들이 꺼려하는 것이 그대들에게 좋은 것일 수 있으며 그대들이 좋아하는 것이 그대들에게 나쁜 것일 수 있노라. 하나님께서는 아시나 그대들은 알지 못하노라. [꾸란 2:216]
인간을 시험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시련은 개개인의 필요와 환경에 최적화된 형태로 나타난다. 즉 하나님께서는 개개인의 능력에 맞게 시련의 강도를 조정함으로써 그들이 최상의 결과를 낼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다. 견뎌낼 수 없는 혹독한 시련으로 시험을 받고 그러한 시련을 통과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벌을 받는다면 이는 불공평하고 불공정한 처사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꾸란의 여러 구절을 통해 강조하시길 그분께서는 그 어떤 누구에게도 불공정하지 않으신 분이시다. 알-카흐프 장에서 말씀하시길,
“그리고 그대의 주님은 그 누구도 불공정하게 대우하지 않으시노라" [꾸란 18:49]
하나님이 진정으로 공정하신 분이라는 뜻은, 인간이 겪는 시련이 그가 견딜 수 없는 능력 밖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에게 이러한 사실을 확실히 주지시키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꾸란의 여러 구절을 통해 이 사실을 반복하고 알려주고 계신다. 예를 들어 꾸란의 제 2장 알-바까라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개인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짐을 부과하지 않으시니" [꾸란 2:286]
또한 가장 존엄하신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길 인간이 직면하는 어려운 상황에는 항상 그 사이에 휴식을 위한 시간이 있다는 것이다. 만약 시련이 연속해서 온다면 인간은 결코 그 시련들을 견뎌낼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시련 뒤에는 항상 휴식을 위한 시간이 마련되어 있다. 알-인쉬라흐 장을 통해 하나님께서 두 번씩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시길 :
“진실로 어려움과 함께 쉬움이 있노라. 진실로 어려움과 함께 쉬움이 있노라" [꾸란 94:5-6]
절망
이러한 사실에 기인하여 이슬람은 자살을 명백히 금지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안-니싸 장을 통해 말씀하시길 :
“그리고 그대들 자신을 죽이지 말라. 진실로 하나님께서는 그대들에게 가장 자애로우신 분이라." [꾸란 4:29]
자살하는 자들의 주장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을 주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창조주께서 그들을 불공정하게 대우했다고 비난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들의 타락함은 불신자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 믿음을 저버리고 하나님에 대한 부정한 생각을 하는 그들은 따라서 깊은 절망의 늪에 빠져든다. 그들은 보통 이렇게 말한다. “삶은 불공정하다. 따라서 삶을 영위하는 것은 아무 가치도 없다."
“진실로, 하나님의 자비에 대해 체념하는 자는 오직 불신하는 사람들 뿐이라" [꾸란 12:87]
따라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알려주시길, 그분에 대해 사악한 생각을 품는 자에 대한 응벌은 지옥의 고통이라 하셨다. 알-파트흐 장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길
“그리고 남자 위선자들과 여자 위선자들, 남자 우상숭배자들과 여자 우상숭배자들을 벌하기 위함이라.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사악한 생각을 품은 자들이니 그들에게는 치욕의 고통이 있을 것이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분노하셨고 그들을 저주하셨으며 그들을 위해 지옥을 준비하셨도다. 얼마나 비참한 종착지인가." [꾸란 48:6]
희망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께서 공정과 자비를 약속하신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믿는 자들은 이 세상의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필요한 자신감을 갖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희망은 신앙의 중요한 부분을 이룬다. 하나님을 믿고 올바른 행위를 실천하기 위해 인내하고 노력하는 자에게는 그분의 자비를 희망할 권리가 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인내하는 자를 도와주시고 격려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오 믿는 자들이여! 인내심과 예배로써 도움을 요청하라. 진실로 하나님께서는 인내하는 자들과 함께 하시노라." [꾸란 2:153]
“진실로, (하나님과 예언자를) 믿고 (이슬람을 위해) 이주를 단행하고 하나님의 길에서 노력한 자들 그들은 하나님의 자비를 희망하노라.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너그러이 용서하시는 분이시고 가장 자애로우신 분이시라 [꾸란 2:218]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믿음으로써 인내한 자, 그들에 대한 보상은 당연히 천국이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있을 보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알려주셨다 :
“…그러나 인내하는 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라. 그들에게 시련이 닥쳤을 때 그들은 이렇게 말하더라. '진실로 우리는 하나님께 귀속되며 진실로 우리는 그분께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꾸란 2:155-6]
인내는 또한 다음의 믿음을 기초로 한다. 즉 인간이 겪는 재앙은 그들 자신이 실천한 그릇된 행동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61]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성서 앗-슈라 장을 통해 이 사실에 관해 말씀하고 계신다 :
“너희들에게 닥친 모든 시련은 너희들 손이 얻은 것에 기인하노라. 그리고 그분께서는 많은 것을 용서해주시노라. [꾸란 42:30]
그러나 사실을 살펴보면,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저지른 많은 죄를 용서해주셨다. 만약 그분께서 그들의 죄를 엄격하게 벌하시길 원하셨다면 지구상의 그들 모두는 파멸되고 말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파띠르 장에서 이 사실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신다.
“그리고 만약 하나님께서 인간이 얻은 것을 벌하셨다면 그분께서는 움직이는 어떤 생명체도 지구 표면 위에 남겨두지 않으셨을 것이라." [꾸란 35:45]
따라서, 좋은 것으로 시험을 받거나 나쁜 것으로 시련을 겪어도, 믿는 자에게도 모두 이익이다. 진정으로 믿는 자의 삶은 인간 행동의 극단의 두 측면, 그 가운데에서 균형을 취하고 있다. 그들은 성공에 대해 너무 기뻐한 나머지 하나님의 존재를 잊어버리는 자들이 아니며 그들이 직면한 어려움과 실패에 기죽어 하나님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리지도 않는다. 대신 그들은 후하게 베푸시는 그들의 주님을 기억하고 그분의 결정을 따르고 수긍한다. 슈하입 이븐 시난이 전하길 하나님의 사도(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믿는 자의 일상이란 얼마나 놀라운가! 그의 삶 모두가 그에게 득이 되니, 이는 믿는 자의 경우에 한해서라. 편한 시기에 그는 감사하는 자니 이것은 그에게 득이 되노라. 어려운 시기에 그는 인내하는 자니 이것 역시 그에게 득이 되노라."[62]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운명을 받아들인 자의 행동 가짐이다. 따라서 운명 지어진 좋은 것과 나쁜 것에 대한 믿음은 이슬람의 여섯 번째 '믿음의 기둥'이 된다.*
또 다른 한편으로, 만약 믿는 자들이 자신의 삶에 아무런 문젯거리도 없다고 느낀다면 이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뜻이다. 이러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진정으로 믿는 자라면 자신의 삶에 대해 시간을 내어 숙고해보아야 한다. 시련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 자신이 그 시험을 의식하고 못하고 있거나 아니면 자신이 올바른 길을 벗어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앗-타우바 장을 통해 믿는 자에게 알려주시길, 많은 재산과 자식들로부터 얻는 불신자들의 즐거움이란 단지 그들에게 내려질 징벌의 서막일 뿐이다.
“그들의 재산과 그들의 자식들에 놀라워하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그것들로써 현세에서 그들을 벌하시고 그들의 영혼이 떠날 때 그들이 불신자로 남아있게 하고자 하심이라." [꾸란 9:85]
이 말은, 믿는 자가 현세의 삶에서 시련과 어려움을 바라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기도할 것을 가르쳐주셨다. “우리의 주님, 우리 이전의 자들에게 부과하셨던 것과 같은 무거운 짐을 우리에게 부과하지 말아 주십시오."[63] 대신 믿는 자들은 그들에게 닥치지 않은 시련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그러나 평온한 시기에도 그들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다가올 시련을 항상 염두해야 한다. 종종 사람들은 당장의 성공과 행복으로 인해 앞으로 있을 시련에 둔감해지기 때문이다.
교훈
시험은 빗나간 자들에 대한 응징의 교훈이 되며 그들이 올바른 길로 되돌아 올 수 있게 도와준다. 방황하는 자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조언을 잘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자신에게 혹은 그 주위의 사람, 또는 소중한 사람에게 재앙이 닥칠 때면, 믿음을 가진 자는 비로소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진실로 나[64]는 그들에게 크나큰 고통 이전에 더 가까운 고통을 맛보게 할 것이니 그들이 돌아오도록 하기 위함이라." [꾸란 32:21]
그들의 방황을 일깨워줄 재앙은 인간의 비인도적 행위로 나타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이슬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던 보스니아 무슬림이 경험한 세르비아인들의 극단적 잔학 행위, 이라크 대통령 사담 후세인의 야만적인 쿠웨이트 침공과 그에 뒤따른 미국의 무차별 민간인 폭격 등이 그러한 경우라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지적하시길, 타인에 의한 인간의 고통은 그들 자신이 원인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그 고통은 신앙의 길로 되돌아가게 하는 교훈이 된다.
“대지와 바다에 사악함이 드러났으니 이는 인간의 손이 얻은 것에 말미암은 것이라. 이로써 그분께서는 그들이 행한 것의 일부를 맛보게 하시니 그들이 돌아오도록 하기 위함이라." [꾸란 30:41]
위선
시련을 통해 거짓으로 믿는 자가 누구인지 드러나며, 또한 자신의 의지로 지옥을 선택한 불신자들이 누구인지도 알게 된다. 신앙 이외의 이유로 이슬람으로 입교한 후, 입교 전보다 삶이 더 힘들어질 때 이전의 종교로 되돌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마지막 성서 꾸란의 알-안카부트 장을 통해 아래와 같이 말씀하고 계신다 :
“''우리는 믿습니다'라고 말했으니 이제 아무런 시련도 겪지 않을 것이라고 인간은 생각하는가. 이미 나[65]는 그들 이전의 자들을 시험하였고 이로써 하나님께서는 진정으로 믿는 자들을 아시고 거짓말하는 자들을 아시노라." [꾸란 29:2-3]
응벌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한계를 넘어선 자들에 대해선 현세와 내세의 응벌이 준비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꾸란 전반을 통해 수많은 과거 세대들이 그분의 인도를 거부하였고 결국 그들 모두 멸망을 맞이한 사실을 묘사하고 계신다. 이 모든 이야기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복종한 결과가 어떠한지 인간에게 경고하는 역할을 한다. 안-누르 장에서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경고하셨다.
“그(예언자 무함마드)의 명령을 어긴 자들은, 그들에게 시련이 닥치거나 또는 그들에게 고통의 벌이 닥칠 수 있음에 유의하라." [꾸란 24:63]
벌의 형태는 다양하다. 인간에게 닥친 가장 쉽게 인식할 수 있는 벌은 오늘날의 모든 국가가 겪고 있는 에이즈[66]라는 병일 것이다. 의학 역사상 에이즈가 제일 처음 발병한 시기는 1980년대 초반이다.[67] 전세계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이 병에 걸린 자의 대부분은 성관계가 문란한 자들이다. 동성연애자가 가장 발병 확률이 높으며 그 다음은 양성애자, 그 다음은 성관계가 문란한 이성애자와 정맥주사로 마약을 복용하는 자들이다. 이들 모두는 하나님의 법률을 어긴 자들로서, 오직 결혼이라는 테두리 내에서만 남녀 사이의 성적 관계를 허락한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이며 마약 복용을 금지한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이다. 몇몇 이들은, 에이즈가 수혈(輸血)이나 유전에 의해서도 발생할 수 있다고 반론을 제기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의학 통계를 보면 그러한 경우는 다른 카테고리에 비해 훨씬 적은 수치에 불과하다. 어찌됐든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성서 꾸란의 알-안팔 장을 통해 경고하시길, 그분의 벌은 사악한 자에게만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 하셨다.
“그리고 재앙을 두려워하라. 그것은 그대들 중 악한 짓을 저지른 자에게만 닥치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응징하심에 엄하신 분임을 알라." [꾸란 8:25]
1,400년 전에 예언자 무함마드(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께서는 그러한 시련이 다가올 것임을 미리 예언하셨다. 이븐 우마르가 전하는 그의 말씀은 다음과 같다.
“문란한 성생활이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질 때, 그들에게 전례 없는 전염병과 고통이 도질 것이라."[68]
그러나, 에이즈는 예견된 질병의 일부에 불과하다. 이미 에이즈 전에 포진(疱疹, 헤르페스)이라는 이름의 병이 도래했었고, 그 병은 1960년대와 70년대 사이 성생활이 문란한 자들에게 널리 퍼진 바 있다. 70년대 중반에 미국은 이 병을 전염병으로 규정하였고, 지금까지도 알려진 치료법이 없는 실정이다. 70년대 후반에 사람들의 주의는 포진에서 에이즈로 옮아갔는데, 포진이 죽음을 초래하는 병이 아닌 반면[69] 에이즈는 목숨을 앗아가는 치명적인 병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왜 세상을 창조하셨는가?
하나님의 마지막 성서 꾸란에는 인간과 관련하여 세상과 그 속의 만물이 창조된 이유가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이브라힘 장과 알-안암 장에서 말씀하시길 :
“하나님 그분께서는 하늘들과 땅을 창조하신 분이시며 하늘로부터 물(비)이 떨어지게 하신 분이시라. 그리하여 그것으로부터 과일들이 맺어지니 그대들의 양식이라. 그리고 그대들을 위해 배(船舶)를 유용케 하시니 배가 그분의 명령에 따라 바다 위를 항해하더라. 또한 그대들을 위해 강을 유용케 하셨도다. 그리고 그대들을 위해 태양과 달을 유용케 하시니 그 둘은 정해진 궤도를 따르더라. 또한 그대들을 위해 밤과 낮을 유용케 하셨노라." [꾸란 14:32-33]
“새벽을 여시는 분. 그리고 그분께서는 휴식을 위해 밤을 두셨고 (시간) 계산을 위해 태양과 달을 두셨도다. 이것이 바로 가장 존엄하시고 가장 잘 아시는 분의 셈법이라. 그리고 그분께서는 너희들을 위해 별들을 두셨으니 그것들로써 육지와 바다의 어둠 속에서 너희들이 방향을 잡기 위함이라. 실로 나는 아는 이들을 위해 징표들을 상세히 설명하였노라.“ [꾸란 6:96-7]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이 창조된 목적은 인간이 그것들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인간이 발명한 것 -예를 들어 선박- 이든 자연 그대로의 것이든, 그 모두는 인간의 유용함을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공해주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선물에 대해선 반드시 책임이 뒤따른다. 인간은 하나님의 축복과 자비를 인식하고 그분께 감사하고 그분을 찬미해야 한다. 예를 들어, 그분께서는 앗-주크루프 장을 통해 믿는 자들에게 가르쳐주시길, 동물이나 교통수단을 탈 경우 다음과 같이 기도하라고 하셨다.
“(배와 가축을 둔 이유는) 그대들이 그것의 등 위에 올라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 그 후 그것 위에 올라탔을 때 그대들이 그대들 주님의 은총을 떠올리며 다음과 같이 말하도록 하기 위함이라. '저희들을 위해 이것을 유용케 해주신 하나님께 찬미를 드립니다. 저희들에겐 그것을 부릴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진실로 우리는 우리의 주님께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꾸란 43:13]
인간은 또한 자연을 사용함에 있어 하나님의 법률을 따를 책임이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연을 사용할 때 그분의 법률을 준수할 것을 명령하셨다. 아부 사이드 알-쿠드리가 전하는 하나님의 사도(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의 말씀은 다음과 같다.
“이 세상은 아름답고 푸르도다. 그리고 지고하신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이 세상의 관리자로 두셨으니 그분께서는 여러분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실 것이라."[70]
인간은 자연을 내키는 대로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세속적 물질주의자들이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은 하나님의 계시에 입각한 관점과 상반된다. 물질주의 사회는 자연을 정복해야 할 적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그들은 에베레스트 산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 반드시 정상까지 올라 산을 '정복'해야만 하는 그들은, 그 결과 매년 수명이 목숨을 잃는다. 진기한 동물의 왕국에 감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그들은 지난 세기 싸파리(사냥 여행)를 통해 무차별적으로 동물을 죽였고 결국 많은 동물이 멸종 위기에 처했다. 이는 단지 그들의 거실에 '1등 사냥꾼' 트로피를 갖다 놓기 위한 것이었다. 현재는 싸파리가 사라졌지만, 그 수가 확연히 줄어든 동물들 중 코뿔소 같은 경우는 지금도 멸종의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다. 코뿔소의 뿔은 한약이나 최음제의 재료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동물
하나님의 마지막 성서에 따르면 재미를 위해 동물을 죽이는 행위는 금지되며 그러한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된다. 이븐 압바스가 전하는 하나님의 사도(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의 말씀은 다음과 같다.
“살아있는 동물을 과녁으로 삼지 말라"[71]
살아있는 동물을 죽이는 행위는 금지된다. 단, 그 목적이 음식을 얻기 위한 것이거나 인간의 목숨을 보호하기 위해 혹은 옷을 만들기 위한 것이라면 예외다. 재미로, 놀이의 방편으로 동물을 죽이는 행위는 근본부터가 사악한 짓이다. 범죄의 응벌로서 사람을 처형하거나 음식을 위해 동물을 죽일 때조차도 고통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샷다드 이븐 아우스는 하나님의 사도(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께서 말씀하신 두 가지를 회상하면서 다음과 같이 그의 말씀을 전했다.
“진실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에 최선을 다할 것을 명령하셨노라. 그러니, 누군가를 처형할 때 좋은 방식으로 처형하고 동물을 도살할 때 좋은 방식으로 도살하라. 도살 전에 칼을 예리하게 잘 갈아서 도살되는 동물이 편히 죽을 수 있도록 하라."[72]
서구의 소위 '동물 애호가' 중 일부가 이슬람의 도살 방법을 비판하지만, 정작 서구에서 사용하는 도살 방식이란 전기 충격이나 망치로 머리를 가격하는 등 동물에게 훨씬 더 많은 고통을 주는 것들이다. 아주 잘 드는 칼로 동물의 목을 베는 이슬람 도살 방식의 경우, 심장으로부터 뿜어진 피가 동맥 밖으로 곧바로 분출되기 때문에 동물은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한 채 재빨리 의식을 잃는다.
이슬람의 법률은 동물을 친절히 다룰 것을 규정하고 있다. 심지어는 무슬림 가정에서 기를 수 없는 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73] 아부 후라이라가 전하는 예언자(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의 말씀은 다음과 같다.
“한 남자가 길을 걷다 목이 말라 우물 밑으로 내려가 물을 마셨노라. 그가 우물 밖으로 나왔을 때, 갈증으로 헐떡거리며 진흙을 핥는 개를 발견하였고 그 남자가 생각하길 '이 개도 내가 그랬던 것처럼 목이 마르구나'. 그래서 그는 다시 우물 밑으로 내려가 자신의 신발 속에 물을 채운 후 앞니로 신발을 깨문 채 우물 밖으로 올라와 그 개에게 물을 주었노라. 이에 하나님께서 그를 보상하여 주셨고 그의 죄를 용서하여 주셨노라[그리고 그를 천국으로 들게 하셨노라].[74]
이에 사람들이 묻길 “오 하나님의 사도시여! 동물에게 친절해도 보상을 받습니까?" 그가 대답하시길
“보상을 받는 친절함의 대상은 살아있는 모든 것에 해당되노라."[75]
역시 아부 후라이라가 전하길, 하나님의 사도(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의[76]) 매춘부를 용서하셨노라. 그녀는, 갈증으로 죽을 것 같아 보이는 개를 위하여 자신의 머릿수건에 신발을 메어 [우물로부터] 물을 길어 개에게 주었으니 그러한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그녀를 용서하셨노라."[77]
반대로, 동물에게 해를 가하는 행위는 이슬람법에 따르면 중죄에 해당한다. 압둘라 이븐 우마르가 전하길 하나님의 사도(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께서 아래와 같이 말씀하셨다.
“한 여자가 벌을 받고 지옥에 들어갔노라. 그녀는 고양이를 가두어 죽게 내버려두었는데, 그 고양이에게 음식이나 물도 주지 않았으며 그 고양이를 자유롭게 풀어주어 쥐를 사냥할 수 있도록 하지도 않았노라."[78]
부득이하게 동물에게 고통을 가해야 하는 경우가 있기도 하다. 예를 들어 동물이 움직이도록 채찍을 가한다든지, 식별을 위해 낙인을 찍는다든지 하는 경우가 그러하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조차 하나님께서는 동물을 보호할 것을 지시하셨다. 자비르가 전하길 예언자(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께서는 동물의 얼굴을 때리지 말며 동물의 얼굴에 낙인을 찍지 말 것을 명령하셨다.[79]
식물
이 세계를 돌보아야 할 인간의 책임은 비단 동물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법에 따르면 식물계 역시 존중의 대상이 된다. 그러한 연유로 전쟁 중인 무슬림일지라도 적국의 과일 나무를 함부로 베는 행위는 금지되며[80], 평상시에 나무를 심는 것조차 자선 행위로 간주된다. 자비르가 전하는 하나님의 사도(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의 말씀은 다음과 같다.
“나무를 심은 무슬림은 자선 행위를 실천한 것과 같은 보상을 받노라. 나무로부터 나오는 먹거리 모두가 자선으로, 사람들이 몰래 훔쳐 먹은 것, 동물이 먹은 것, 새가 먹은 것 모두 자선이라. 사람이든 동물이든 나무로부터 가져간 것 모두가 나무를 심은 자에게 자선 행위로 보상되노라."[81]
이슬람은 나무 심기를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다. 심지어는 그것이 믿는 자가 할 수 있는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행위가 될지라도 말이다. 아나스가 전하길 예언자께서(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부활의 날의 징조가 시작될 때, 만약 자신의 손에 묘목이 있다면, 부활이 시작되기 전에 서둘러 그것을 심어야 하노라."[82]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지구에 거주하면서 그분만을 경배할 것을 명령하셨고, 인간은 지구의 자연 영역 모두를 잘 돌보아야 할 책임이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물질 만능주의자들이 저지르는 환경 오염이나 동식물계 파괴행위 등에 대해 우리는 능동적으로 반대의 목소리를 내어야 한다. 이슬람에 따르면, 이러한 의무를 소홀히 하는 행위는 죄로 간주되며, 반대로 그 의무를 충실히 시행했을 때는 신앙 행위로 인정받는다.
결론
창조의 목적을 알지 못하는 인간은 마치 방향타 없이 항해하는 배처럼 방황하면서 이 세상을 살게 된다. 이러한 상태에서 그의 삶의 목적이란, 그릇된 종교의 가르침에 기인한 그릇된 목적이거나 현세의 삶에만 치중한 아주 물질적인 목적 둘 중의 하나이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왜 하나님께서 자신을 창조하셨는지 알아야만 한다.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속성을 드러내시기 위해 창조를 시행하셨다. 즉, 창조는 창조주라는 그분의 속성의 결과물이며, 천국은 그분의 자비와 은총을 드러내며, 지옥은 그분의 공정하심을, 인간의 실수는 그분의 너그러우심을, 생명체와 무생물체는 그분의 관대하심을 드러낸다. 창조가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임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사실을 숙지하고 있을 때만이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을 정확히 인지하고 우리의 운명을 잘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 종류의 창조 중에서 특히나 '인간' 창조의 목적을 아는 것은 인간에게 중요한 문제이다. 마지막 계시종교 이슬람이 가르쳐주길, 인간 창조의 목적은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함이며, 이로써 인간은 고결함과 내면의 성숙을 얻게 되고 그리하여 결국 그는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 인간 창조의 목적을 잘 숙지함으로써 인간은, 경배 행위가 먹고 숨쉬는 것만큼 필수불가결한 것임을, 그리고 그러한 경배행위는 자신이 하나님께 베푸는 자선행위가 아님을 알게 된다.
또한, 인간은 이 세상에서 겪는 여러 은총과 시련의 중요성을 잘 인식해야만 한다. 자신이 왜 창조되었는지에 대한 지식이 없는 자는 세상 모든 것이 자신에게 적대적이라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세상 모든 것은, 실제로는, 우리 인간을 위해 만들어졌다. 즉, 행복의 시기와 시련의 시기 모두는 인간의 정신적 성장을 위해 설계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신적 성장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탁하고 그분께서 운명지으신 것에 대해 인내할 때만이 습득 할 수 있다. 하나님을 부정하는 자에게 있어 이 세상의 시련이란, 그들에게 닥칠 내세의 영원한 벌에 앞서 현세에서 미리 맛보게 되는 벌이다.
지구가 창조된 목적을 아는 자는 또한 자연 보호에 대한 적극적인 인식을 가지게 된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내려주신 여러 은총을 남용해서는 안 된다. 인간은 육지 및 바다상의 동식물과 우리가 숨쉬는 공기 모두를 잘 관리해야 할 책임이 있다. 따라서 인간은 환경 및 동식물 보호에 중대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것이 곧 하나님께 감사하는 방법이 되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창조의 목적들 모두를 잘 인지한 자는 부족함이 없는 인품을 지니게 되고, 인간의 훌륭한 모범으로서 타인에게 올바른 길을 제시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마지막 성서 꾸란에서 묘사하신 것처럼 그들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자들이다.
“그대들은 인간 사회에 출현한 가장 훌륭한 공동체로서 선을 권하고 악을 금하며 하나님을 믿더라." [꾸란 3:110]
[1] 그는 자신의 저서 <국가론>에서 유명한 '동굴의 비유'를 통해, 우리가 인식하는 물리적 세계란 동굴 벽에 비춰진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The New Encyclopaedia Britannica, 제 25권, p.552)
[2] 구약의 이사야에 따르면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다. '그러나 이제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주께서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주께서 말씀하신다. … 북쪽에다가 이르기를 '그들을 놓아 보내어라' 하고, 남쪽에다가도 '그들을 붙들어 두지 말아라. 나의 아들들을 먼 곳에서부터 오게 하고, 나의 딸들을 땅 끝에서부터 오게 하여라.
나의 이름을 부르는 나의 백성, 나에게 영광을 돌리라고 창조한 사람들, 내가 빚어 만든 사람들을 모두 오게 하여라' 하고 말하겠다." (표준새번역, 이사야 43장 1, 6, 7)
[3] '하나님은 하시던 일을 엿샛날까지 다 마치시고, 이렛날에는 하시던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 이렛날에 하나님이 창조하시던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으므로, 하나님은 그 날을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셨다.' (표준새번역, 창세기 2:2, 3)
[4]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 하셨다.' (표준새번역, 창세기 6:6)
[5] 누가복음 19:45
[6] The New Encyclopaedia Britannica, 제 14권, p.814
[7] 4세기 중반 경의 필사본인 코덱스 시나이티쿠스과 바나바서신, 헤르마서 목자서 역시 신약에 편입되었다. (The New Encyclopaedia Britannica, 제 14권, p.814)
[8] 창조의 목적과 관련한 킹제임스 성경의 구절 : 요한계시록 4: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기쁨을 위해 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은 표준새번역에서 '우리의 주님이신 하나님, 주님은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기에 마땅하신 분이십니다. 주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으니, 만물은 주님의 뜻을 따라 생겨났고, 또 창조되었습니다'로 개역되었다.
골로새인들에게 보낸 바울의 서신에서 바울이 설명하길, 세상은 예수를 위해 창조되었다. “그 아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분이십니다. 만물이 그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 왕권이나 주권이나 권력이나 권세나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표준새번역, 골로새서 1:15-16)
[9] 요한복음, 3:16(표준새번역)
[10] '지식'이란 뜻을 지닌 베다는 힌두교의 계시서(sniti:귀로 들은)를 뜻하는 포괄적 용어다. 베다 이외의 것들은 인간이 창작한 것으로 인식되어 smriti(기억되는)로 분류된다. 힌두교의 실제 교리와 의식은 smriti로부터 나온다(The New Encyclopaedia Britannica, 제 20권, p.530).
[11] Manava Dharmasastra 1.91.(The New Encyclopaedia Britannica, 제 20권, p.553)
[12] 인격을 가진 신을 위해 헌신하는 길이며 그 길을 통해 다음 삶에서 krishnaloka(신비한 행성)에 가고자 하는 희망으로 murtis(우상)을 섬긴다.
[13] The New Encyclopaedia Britannica, 제 20권, p.520.
[14] The New Encyclopaedia Britannica, 제 20권, p.529-530.
[15] 이것은 궁극적 실체, 즉 '브라만'에 대한 힌두교의 믿음이기도 하다. Rigveda의 마지막 책자(제 10권)의 '우주적 인간의 찬가'(Purusasuktd)에서는, 최초의 희생시 우주적 인간(Puriisa)의 몸이 불에 타 분리되었고 그로부터 나온 신체의 일부분이 우주가 되었다고 한다. 이 신체로부터 네 개의 카스트 제도가 나왔다 : 승려계급(브라만)은 입으로부터, 무사계급(라자냐)은 팔로부터, 서민계급(바이샤)은 허벅다리로부터, 노예계급(수드라)은 다리로부터 비롯되었다. (The New Encyclopaedia Britannica, 제 20권, p.531)
[16] 압바스가 전하고 앗-티르미디가 수집함. 싸히흐 수난 앗-티르미디 에서 싸히흐(권위있는하디쓰)로 분류됨.
[17] 싸히흐 무슬림, 제 4권, p.1434-1436, no.6621. 아부 아이윱 알-안싸리가 전함.
[18] 싸히흐 무슬림, 제 4권, p.1437, no.6628. 아부 후라이라가 전함.
[19] 싸히흐 무슬림, 제 4권, p.1437, no.6631. 아부 후라이라가 전함.
[20] 싸히흐 무슬림, 제 4권, p.1400, no.6435
[21] 앗-티미르디가 수집함. 싸히흐 수난 앗-티르미디(제 3권. pp.175-6, no.2085)를 통해 싸히흐(권위있는 하디쓰)로 분류됨.
[22] 싸히흐 무슬림, 제 4권, p.1473, no.6765, 아부 후라이라가 전함
[23] 싸히흐 무슬림, 제 4권, p.1473-4, no.6770, 아이샤가 전함
[24] 아부 니라임이 알-힐야 를 통해 수집함. 알-알바니가 그의 저서 실실라 알-아하디쓰 앗-싸히하(제 4권, p.12, no.1788)를 통해 '싸히흐'로 분류함. 앗-따바라니의 알-아쓰와트, 알-바이하끼의 슈으바 알-이만 에서 이븐 우마르가 비슷한 하디쓰를 전하고 있음.
[25] 싸히흐 무슬림, 제 1권, p.77, no.242 & 243.
[26] 싸히흐 무슬림, 제 1권, p.77, no.244, 싸히흐 알-부카리, 제 4권, p.320, no.496.
[27] 이 날은 아라파트의 날로 불림.
[28] 아흐마드가 수집함. 실실라 알-아하디쓰 앗-싸히하(제 4권, p.158, no.1623)를 통해 싸히흐로 분류됨.
[29] 진은 이성을 지닌 보이지 않는 존재로, 하나님께서는 불을 재료로 하여 그들을 창조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경우와 같이 그들에게 자유 의지를 부여하셨다. 따라서 어떤 진들은 신앙심 있는 자들인 반면 다른 진들은 사악한 불신자들이다. 사악한 진은 보통 악마, 악령, 악귀 등으로 불린다.
[30] The Living Webster Encyclopedic Dictionary, p.1148.
[31] 우레는 하나님을 찬미하고(13:13) 낮과 밤(21:20), 그리고 산(38:18)도 마찬가지다.
[32] 마태복음서 19:16-17(표준새번역)
[33] 수난 아부 다우드, 제 3권, p.1125, no.4009. 싸히흐 수난 아비 다우드, 제 2권, p.760, no.3393을 통해 싸히흐로 분류됨.
[34] 수라 알-안암 (6):153
[35] 아흐마드, 안-나사이, 앗-다리미가 수집함. 아흐마드 샤키르의 알-무스나드 제 6권, pp.89-90, no.4142를 통해 싸히흐로 분류됨.
[36] 싸히흐 무슬림, 제 2권, p.410, no.1885.
[37] 싸히흐 알-부카리, 제 3권, pp.535-6, no.861, 싸히흐 무슬림, 제 3권, p.931, no.4266
[38] 싸히흐 무슬림, 제 1권, pp.50-1, no.156
[39] 소승불교(400-250 BC)는 고타마 붓다 죽음 이후 출현하였으며, 대승불교보다 더 오래되었고 엄격하게 불교를 해석한다. 소승불교에서 명확히 주장하는 바는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르다마나가 체계화한 자이나교 역시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그들의 교리에 따르면 해방된 영혼은 영원의 삶과 무한의 지식을 얻는다고 한다. 19세기와 20세기에 몇몇 유럽의 철학자들은 '신은 죽었다'는 철학을 주창하였다. 독일 철학가 필립 메인랜더(1841-1876)과 프러시아 철학가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과 프랑스 철학가 장 폴 사르트르(1905-1980)는 모두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Dictionary of Philosophy and Religion, pp. 72, 262-3, 327, 508-9)
[40] 요한복음 1:1&14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14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표준새번역)
[41] 싸히흐 무슬림, 제 1권, p.30, no.67.
[42] 인간이 굶주리고 병으로 죽어가는데도 멸종 위기의 동물을 보호한답시고 엄청난 돈을 쓰는 것은 20세기의 중대 범죄 중 하나다.
[43] 꾸란, 3:31
[44] 아흐마드, 앗-티르미디, 아부 다우드가 수집함(수난 아부 다우드, 제 3권, p.1312, no.3664. 싸히흐 수난 아비 다우드 제 3권, p.886, no.3915를 통해 싸히흐로 분류됨)
[45] 싸히흐 알-부카리 제 4권, p.291, no.431, 싸히흐 무슬림, 제 4권, p.1385, no.6373.
[46] 이븐 압바스가 전함. 앗-티르미디가 수집하였고 싸히흐 수난 앗-티르미디 제 2권, pp. 308-9, no.2043을 통해 '싸히흐'로 분류됨. 이맘 안-나와위의 하디쓰 40선 p.68, no.19 와 미쉬카트 알-마사비흐 제 2권, p.1099 참조.
[47] 수난 아부 다우드, 제 1권, p.387, no.1474, 싸히흐 수난 아비 다우드 제1권, p.277, no.1312를 통해 싸히흐로 분류됨.
[48] The World Book Encyclopedia, 제1권, p.509
[49] The World Book Encyclopedia, 제11권, p.146
[50] The World Book Encyclopedia, 제 3권, p.417
[51] 대천사 미가엘을 기리는 기독교 축제. 서구 교회에서는 9월 29일, 동방(정교) 교회에서는 11월 8일 실시된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대천사 미가엘, 가브리엘, 라파엘 모두를 기린다. 영국 국교회에 따르면 이 축제의 정확한 명칭은 '미가엘 천사과 모든 천사들을 위한 축제'이다. ( The New Encyclopaedia Britannica 제 8권, p.95)
[52] 앗-슈라 장 (26:214)
[53] 싸히흐 알-부카리 제 4권, pp.478-9, nos. 727&728, 싸히흐 무슬림 제 1권, p.136, no.402.
[54] 아랍어 원문은 '우리'라고 표현되어 있으며, 이것은 장엄복수형으로서 하나님을 가리킨다.
[55] 꾸란 후드 장 11:7 참조.
[56] 싸히흐 알-부카리, 제 8권, pp.297-298, no.447.
[57] 자카는 '정화'(淨化), '성장'이라는 언어적 의미를 갖는다.
[58] 싸히흐 알-부카리, 제 8권, p.328, no.497, 싸히흐 무슬림, 제 4권, p.1530, no.7070
[59] 싸히흐 알-부카리, 제 8권, p.304, no.453
[60] 앗-티르미디와 이븐 마자가 수집함. 싸히흐 수난 앗-티르미디 제 2권, p.286, no.195을 통해 싸히흐로 분류됨.
[61] 사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재앙은 인간이 저지른 범죄의 결과물이다. 하나님께서는 알-룸 장(30:41)을 통해 이 사실에 관해 말씀하고 계신다. 이에 관해 본서 뒤편에서 다시 설명할 것이다.
[62] 싸히흐 무슬림, 제 4권, p.1541, no.7138
* 역자 주 : 이슬람의 여섯 가지 '믿음의 기둥'은 다음과 같다 : 1. 하나님에 대한 믿음, 2. 천사들에 대한 믿음, 3. 성서들에 대한 믿음, 4. 예언자들에 대한 믿음, 5. 심판의 날에 대한 믿음, 6. 정명에 대한 믿음.
[63] 알-바까라 장 (2) :286
[64] 아랍어 원문은 '우리'라고 표현되어 있으며, 이것은 장엄복수형으로서 하나님을 가리킨다.
[65] 아랍어 원문은 '우리'라고 표현되어 있으며, 이것은 장엄복수형으로서 하나님을 가리킨다.
[66] 후천성 면역 결핍증(AIDS)은 병균에 대한 신체의 면역 시스템을 파괴하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상태로서, 이 병에 걸린 환자의 신체는 병균에 대한 저항력이 극도로 낮기 때문에 어떠한 병에 노출되더라도 결국 사망에 이르는 경우가 많다. (Chambers Pocket Dictionary, p.19)
[67] 1,981년 최초로 인지됨. (The New Encyclopaedia Britannica, 제 10권, p.676)
[68] 이븐 마자가 수집함, 싸히흐 수난 이븐 마자 제 2권, p.370, no.3246을 통해 싸히흐로 분류됨.
[69] 이 병의 증상으로는 고열과 오한, 음부의 타는 듯한 고통, 성기의 림프절 팽창 등이 있다. 염증이 발생한 주위에 물집과 작은 궤양이 포착되며 소변시 타는 듯한 심한 고통이 동반된다. (The New Encyclopaedia Britannica, 제21권, p.536)
[70] 싸히흐 무슬림, 제4권, p.1432, no.6606.
[71] 싸히흐 무슬림, 제 3권, p.1079, no.4813 히샴 이븐 자이드가 전하길, 자신과 그의 할아버지 아나스 이븐 말리크가 하캄 이븐 아이윱 집을 방문했을 때 그들은 몇몇 사람들이 암탉을 화살의 과녁으로 쓰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나스가 전하길 하나님의 사도께서 [과녁으로 쓸 목적으로] 동물을 메어두는 행위를 금지하셨다. 싸히흐 무슬림, 제3권, p.1078, no.4182.
[72] 싸히흐 무슬림, 제3권, p.1078, no.4810.
[73] 애완동물로서 개를 기르는 행위는 무슬림에게 금지사항이다. 그러나 집을 지키는 경비견, 양을 지키는 목양견, 사냥을 위한 사냥견은 허락된다. 이븐 우마르가 전하길 하나님의 사도(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경비나 사냥이 아닌 다른 목적으로 개를 기르는 자는 매일 두 개의 산 크기만큼의 선행을 잃을 것이라." (싸히흐 무슬림, 제3권, p.826, no.3815)
[74] 싸히흐 부카리, 제1권, p.120, no.174.
[75] 싸히흐 부카리, 제3권, p.322-3, no.551, 싸히흐 무슬림, 제4권, pp.1215-6, no.5577.
[76] 싸히흐 부카리, 제4권, pp.448-9, no.673.
[77] 싸히흐 부카리, 제4권, p.338-9, no.538, 싸히흐 무슬림, 제4권, pp.1216, no.5579.
[78] 싸히흐 부카리, 제4권, p.456, no.689, 싸히흐 무슬림, 제4권, p.1215, no.5573.
[79] 싸히흐 무슬림, 제3권, p.1163, no.5218.
[80] 무왓따 이맘 말리크, p.200, no.958, 알-알바니가 이르와 알-갈릴 제 5권, p.13-4, no.1190을 통해 싸히흐로 분류함.
[81] 싸히흐 무슬림, 제3권, p.818, no.3764.
[82] 아흐마드가 알-무스나드를 통해 수집함(제3권, pp.183, 184, 191). 알-부카리 역시 알-아답 알-무프라드, no.479를 통해 동하디쓰를 기록함. 알-알바니가 '실실라 알-아하디쓰 앗-싸히하' 제1권, p.11, no.9를 통해 싸히흐로 분류함.